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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셩혜 Jun 08. 2019

큰일을 치렀습니다

십 년 만에 이사했다. 선산에 잠들었던 아빠를 납골당으로 모셨다. 아빠는 살아생전 화장을 원했지만, 사망 직후 몇몇 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매장을 했다. 선산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라는 어른들의 말에 따라 산에 손을 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십 년이 흘렀다. 올해 1월 구십 구 년을 산 큰엄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선산에 손을 대야 했고, 그 덕에 아빠 이장도 진행했다. 출장 차 하와이에 머물고 있던 나는 부랴부랴 돌아왔다. 

이장하기로 한 날, 아침 일찍 산소에 가 마지막 예를 드렸다. 조금 더 좋은 곳으로 옮겨 드릴 테니 시끄럽고 불편해도 잠시만 참으라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소형 포크레인과 트럭이 선산으로 올라와 준비를 마쳤다. 포크레인은 묘비를 들어 선산 뒤 어딘가에 묻고, 묵직하던 흙더미와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봉분을 내려쳤다. 관 위로 흙을 얼마나 덮었는지, 꽤 많은 흙더미가 주위로 흩어졌다. 포크레인 기사는 몇 분간 쌓인 흙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치웠다. 그러다 진한 갈색의 흙 사이로 회백토가 보이기 시작했다. 회백토는 십 년 전 나와 가족들이 관 바로 위에 뿌린 흙이다. 이 말인즉슨 아빠가 잠들어 있는 관이 바로 아래에 있다는 것. 혹시나 포크레인 삽 부분이 관을 건드리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포크레인 기사도 그 순간부터 더 조심스러워하는 눈치다. 관 위의 흙을 쓰-윽 쓱 걷어내고, 포크레인에 쨍쨍한 고무 밴드 같은 걸 연결한 후 관 가운데 부분과 묶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땅 밑의 관을 쑤-욱하고 들어 올렸다. 이장을 진행하던 장의사는 우리를 향해 저 멀리 가라고 손짓했지만, 한 발짝도 꼼짝하지 않은 나와 엄마를 보며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라요.”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 아빠가 저기 누워있는데 시선을 차마 거둘 수가 없다.

땅 위로 올라온 관 바로 앞에 외삼촌이 자리를 지켰고, 관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큰 사위인 남편, 엄마와 나는 결국 열 발자국 뒤쯤에 덩그러니 섰다. 관은 차례대로 열렸다. 뚜껑을 열고 양옆과 위아래 쪽 판자를 거둬냈다. 그러고 나니 바닥을 받치고 있는 판자만 그대로 남았다. 그 판자 위로 십 년 전 헤어질 때 모습처럼 그대로 누워 있는 아빠 모습이 드러났다. 삼베에 쌓여 있지만, 복수가 차올라 불룩하던 배도, 배 위로 가지런히 모은 팔과 손의 형태도 십 년 전 그대로다. 흙 속에서 십 년이면 섞을 만도 한데 생각보다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다. 인부들은 가져온 새 종이와 삼베로 다시 한번 망자를 고이 샀다. 삼베로 싸기 위해 망자의 다리, 허리, 몸을 살짝 들어 올리는 데, 마치 가벼운 나무토막을 드는 것처럼 가뿐해 보인다. 그리고 다시 깨끗한 관으로 옮긴 후 낡은 트럭에 싣고 위로 파란색 천을 덮었다. 관이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하게 고정한 후 김천화장장으로 이동했다. 떠날 때는 살아생전 한 번도 타보지 못한 그 좋은 리무진에 타고 가더니 이장할 때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트럭에 짐짝처럼 옮겨지는 것이 영 편하지 않았는데 어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천화장장은 내가 알고 있던 화장터의 모습과 아주 달랐다. 북적이는 유가족들, 화장 순서를 보여주는 전광판, 자판기, 대기실 따윈 없다. 오래되어 낡은 4-5인용 나무 의자 하나가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의 전부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제단은 마음마저 싸늘하게 한다. 제단 뒤 통유리가 있고 그 안쪽은 화장을 하는 곳이다. 마음을 좀 달래 볼까 싶어 아빠의 영정 사진을 제단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웠다. 가마를 몇 십 개씩 마련해두고 시간에 맞춰 공장처럼 태워내는 시스템이 아니라 단 두 곳의 가마에서 망자는 조용하고도 가볍게 훨훨 타올랐다. 

전날 이장한 큰아버지는 삼십 분 만에 화장이 끝났다는데 아빠는 한 시간 하고도 이십 분이 더 걸렸다. 화장터 직원의 말로는 몸에 습기가 많은 거 같다며 선산과 그곳의 흙에 대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두 손 모아 누워 있던 아빠는 앙상한 뼈만 남겨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 가루가 되어 납골함에 담겼다. 엄마가 건네받을 자신이 없는지 내 등을 민다. 납골함은 결국 내 손에 안겼다. 보자기로 둘러싼 함이었지만 온기가 무척 진했다. 김천에서 한 시간을 더 움직여 군위에 있는 성당 납골당에 도착할 때까지 그 기운은 쉬이 사라질 줄 몰랐다. 차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보다 더 뜨겁다. 

신부님 외삼촌을 비롯한 몇몇 식구들이 함께 미사를 드리고 천주교 연도(위령기도)를 읊었다. 그러는 사이 묘원 직원이 아빠가 안치된 벽체식 봉안담의 문을 닫았다. 대리석으로 된 그 문을 나사로 하나하나 조이는데 마치 내 가슴이 조이는 듯 미어져 ‘자녀의 기도문’을 읽어 내려갈 수가 없다. 작지만 굳은 대리석 문 하나로 우리는 다시 전혀 다른 곳의 사람이 되었다. 엄마 앞에서는 눈물 흘리지 않겠다던 내 다짐이 십 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평생을 주택에서 흙을 밟고 살았던 아빠는 한 줌 가루가 되어 아파트처럼 생긴 새로운 집에 이사해 영면에 들었다. 이 상황을 알 리 없는 일곱 살과 네 살 된 조카는 외할아버지의 새집이라며 해맑게 뛰어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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