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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셩혜 Mar 16. 2019

난생처음 알게 된 의학 용어, Cancer

1996년 출간된 김정현의 장편소설 <아버지>는 또래들이 로맨스 소설에 흠뻑 빠져 있을 때 내가 빠져들어 단숨에 읽은 책이다. 이 소설은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눈앞에 둔 50대 중년 남자 ‘정수’가 그의 가족들에게 보여주는 사랑과 가족 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을 어떤 경우로 읽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 소설은 술술 읽힐 정도로 몰입도가 상당했다. 눈물을 쏙 뺄 정도는 아니었지만 슬펐다. 하지만 울진 않았다. 그땐 마냥 종이 속을 떠다니는 활자에 불과했다. 중학생이던 내가 이 책에서 유독 기억하는 한 문장이 있으니 바로 주인공이 자신의 병을 알게 되는 장면이다. 소설 속 ‘정수’는 친구이자 의사인 ‘남 박사’로부터 췌장암 말기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때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캔서(Cancer)’라는 의학 용어이다. 왜 하필이면 내가 처음 알게 된 의학 용어가 ‘암’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땐 하나의 의학 용어로 단어를 기억했다기보다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운다는 심산이었다. 그 책이 출간된 1996년은 ‘암’이라는 병이 흔치 않았다. 그렇기에 ‘암’이라고 하면 모두 죽는다고 알았다. 

소설 속 ‘정수’처럼 아빠가 암 판정을 받은 건 누구나 그렇듯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고 우리 가족이 알았을 때 이미 암은 상당히 진행된 후였다. 4기에 가깝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한 가지 다행으로 여긴 건 다른 부위로 전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빠가 돌아가신 2009년의 ‘암’은 1996년 소설 속 ‘암’처럼 모두 죽는 병은 아니었다. 적게는 1~2년, 길게는 5년 넘게 생존하는 사람도 많았다. 약으로 연명하던, 남의 장기를 빌리던 각가지 방법으로 버터 냈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빠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약과 방사선 치료에 지쳐가겠지만 그렇게라도 몇 년쯤 곁에 있어 주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것 같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리석고 이기적인 생각이다. 나 아니 몇몇 사람 마음 아픈 게 싫다고 아픈 사람에게 애써 참으며 견뎌 달라고 애원한다는 것이 말이다. 

서울 큰 병원에 가지 않고 집 근처 대구 병원에서 치료받겠다던 아빠는 우리 설득에 고집을 피우더니 본인 친구이자, 와이프의 오빠 즉 처가댁 식구인 외삼촌의 말 한마디에 아무 말 없이 서울로 따라나섰다. 이틀 뒤 대구 동산병원에서 받은 진료 자료를 들고 서울 강남의 큰 병원으로 향했고, 병원에 입원하는 대부분의 환자처럼 1인실에서 며칠간의 호사를 누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입원한 다음 날 새벽 6시께 담당 레지던트는 환자인 아빠와 보호자인 엄마를 불렀다. 그리고 모니터 속 영상을 보며 친절하게 “아시죠? 알고 오셨죠?”라며 확인 사살을 했다. 말이 확인 사살이지, 아빠에게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가시 같은 한 마디였을 테다(아직도 그 레지던트에게 궁금하다. 굳이 꼭 하루를 시작하는 이른 새벽에 불러 사람의 기운을 그리 꺾어야 했을까? 만약 자신의 부모였다면 그랬을까?).

하여튼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게 된 의학 용어, ‘캔서(Cancer)’. 책에서 본 그 의학 용어로 아빠를 잃게 될 줄 꿈에도 몰랐고, 꿈엔들 몰랐다. 소설 속 이야기는 결국 내게 수필이 되었다. 소설 속 ‘정수’처럼, 아빠도 그랬다. 착하고 표현이 서툰 사람이지만 삶의 무게와 가장에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히, 묵묵히 다 했다. 나와 동생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사랑해주었고 말수는 적었지만, 유머도 있었다. 


이 소설은 말한다. ‘사랑을 얻는 용기만큼 사람을 보내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것이 영원한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나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본다. 좀 더 잘 보낼 방법으로 활자를 선택했지만, 이것이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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