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겨울 사이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덥고 길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 속에서 가을은 문득, 기척도 없이 찾아왔다.
짙은 녹음은 어느새 단풍빛으로 물들고,
파아란 하늘 아래 반짝이던 노란 은행잎들은
건들바람을 타고 바닥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늘은 높아지고 바람은 선선해지며
한때 뜨겁던 것들이 식어가는 자리마다
서늘함과 쓸쓸함, 고독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가을은 늘 짧다.
여름이 물러났나 싶으면 이미 늦가을이고,
떠날 기척을 느끼는 순간에는 희미한 뒷모습만 남아 있다.
봄이 떠오르는 아침해와 같다면
가을은 저무는 저녁노을과 닮아 있다.
해가 기울며 붉은빛이 서서히 사라지는 그 순간,
짧은 하루가 저물어 가는 감정과 희미해지는 생의 그림자가 포개진다.
봄이 발산과 상승의 기운이라면
가을은 내면으로 침잠하며 아래로 내려앉는 기류다.
해가 짧아지고 잎이 떨어지는 풍경 속에서 우리는 생의 한계와 죽음의 순환을 떠올린다.
그렇게 가을은 자연이 빚어낸 가장 깊은 사색의 장이 된다.
가을은 풍요와 쇠락이 함께 머무는 시간이다.
충만함이 가장 깊어지는 순간, 덧없음은 더욱 선명해지고,
빛은 절정에서 어둠을 향해 기울고, 잎은 아름다움의 끝에서 먼저 떨어진다.
그래서 가을은 채움과 비움이 동시에 숨 쉬는 계절이다.
카뮈는 가을을 “두 번째 봄”이라고 표현했다.
첫 번째 봄이 서툴고 떨리는 꽃이라면,
두 번째 봄은 여러 계절을 견딘 뒤에야 비로소 빛을 품은 꽃이다. 가을의 성숙함은 바로 그곳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도처에 가을빛을 덧입히던 계절은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멀어져 버린다.
늘 그러하듯 조용히 오고, 또 그러하듯 말없이 떠난다.
잠시 머물다 더 깊은 여운만 남기고 사라지는 계절.
화려하지만 조용하고, 짧지만 오래 남으며,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소멸을 받아들이는 계절.
그러면서도 소멸 속에서 삶의 본질을 다시 비춰주는 계절.
나는 이 계절이 너무도 섧다.
온다 간다 말 한마디 없이 제멋대로 왔다 가는 계절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어느새 다시 가을이 그리워진다.
추위와 따스함, 뜨거움의 시간을 지나면
마침내 다시 돌아올 그 짧은 계절이 몹시 그립다.
미처 작별할 준비가 되지 않은 나는
성큼 다가온 추위웨 놀라며 떠난 가을의 온기를 오래 더듬어본다.
짧아서 더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더 애틋하게 그리운 계절.
올해도 그렇게, 나의 가을은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