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란 무엇인가
“전 제 고양이가 아프면 바로 병원에 데려갈 수 있고,
바다에 들어가고 싶어 수영을 배울 수 있어요.
얕은 재주로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정말 운이 좋고 감사한 일이죠. 가진 건 많지 않지만, 그래서 전 제가 부자라고 생각해요.”
최근에 식사를 함께 했던 Y에게서 들은 말이다.
자리는 막힘없이 즐거웠고, 대화는 오래 마음에 남아 만남이 끝난 뒤에도 그 문장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Y의 말을 곱씹다 보니
제주에서 여름이면 매일 퇴근 후 바다로 향해 달과 함께 물 위에 떠 있으면서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던 어느 친구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겹쳐 떠올랐다.
나는 꽤 오랫동안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사고에 익숙해 있었다. 자연스레 세상이 정해둔 공식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남들처럼 열심히 일해 집을 사고 차를 사며 살아가는 삶. 그런 스탠다드한 인생이 가장 훌륭한 인생이라고 막연하게 믿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이었고, 때로는 그 충격이 그대로 배움이 되어 돌아왔다. 최근의 Y와의 만남 역시 그런 연장선 위에 있었다.
부자는 무엇일까. 그리고 누가 부자인 걸까.
흔히 부자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은 백만장자의 이미지다. 통장에 0을 한참 세어야 하는 숫자가 찍혀 있다면 부자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정의된 부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누군가보다 많이 가졌다는 기준 위에 서 있다면 그 위에는 언제나 더 가진 누군가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기준만으로는 영원히 부자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기준도 있다. 건강하면 부자라고 말할 수도 있고, 가족이 많고 화목하면 다복한 부자라고 할 수도 있다. 각자의 삶만큼이나 부의 정의 역시 여러 갈래로 나뉜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부자라고 말하는 Y를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녀는 분명 부자였다.
부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소유의 크기라기보다 태도의 문제에 닿아있다. 즉,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 보다 내가 가진 것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같은 조건 안에서도 어떤 이는 결핍을 먼저 느끼고, 다른 어떤 이는 충만을 먼저 감각한다.
결국 차이는 외부가 아니라, 해석의 방향에 있다.
스스로를 부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을 끊임없이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남들과 비교하며 자신을 과시하지도, 부족함을 애써 감추지도 않는다. 이미 삶의 기준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더 채워야만 의미가 생기는 인생이 아니라, 지금의 상태에서도 충분히 머물 수 있는 인생. 필요하다면 채울 줄 알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면 비울 줄 아는 사람.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 과도하게 미화하지도, 불필요하게 깎아내리지도 않고 지금의 자신을 하나의 완결된 상태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끊임없는 결핍의 연속이 아니라 선택의 연속이 된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지켜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삶.
부는 소유의 총량이 아니라, 자기 삶을 해석하는 권한에 있다.
결국 부자란,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