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경험 #인간이해 #도전의식
“생각 없는 실천은 맹목이고 실천 없는 생각은 공허하다”
내가 종종 되새기면서 나를 점검하는 문장이다.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지 찾아봐도 정확한 출처가 나오지는 않는다. 추측하건대, 철학자 칸트의 책 <실천이성비판>에 있는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문장을 해석한 것 같다.
이 문장을 떠올리면 총학생회를 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학생회를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학생들이 관심이 없을 때이고 두 번째로 힘들 때는 비판을 받을 때다. 학생들을 대표하는 단체이기에 여론을 잘 듣고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때때로 정치평론가로 빙의해서 비판을 쏟아 놓는 학생을 만나면 매우 힘들어진다. 이런 상황은 그 자리에서도 멘탈에 데미지를 입지만, 더 괴로운 것은 일상생활을 하다가 생각이 없어질 때마다 불쑥 찾아와 지속 데미지를 입힌다는 것이다.
당시 입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았지만 항상 생각했던 말이 있다.
"니가 직접 해보면 이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주 가끔, 나를 비판해서 힘들게 했던 사람이 떠오를 때가 있다. 지금은 그냥 그것도 추억으로 여기기에 뒤끝은 없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언해 주고 싶다.
"그 사람에게 프로스트펑크를 해보라고 추천해 주세요"라고.
이름 : Frostpunk (프로스트펑크) / 15세 이용가(국내)
장르 : 건설·경영 시뮬레이션
설명 :
프로스트펑크는 최초의 사회 생존 게임입니다. 당신은 지구상 마지막 도시의 지도자로서, 시민과 기반 시설을 관리해야 합니다. 사회의 생존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한계까지 내몰렸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동안, 당신은 어떻게 변해갈까요?
- 공식 게임 소개
프로스트펑크는 게임선진국 폴란드의 11bit studio에서 만든 (빙하기 생존) 건설·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게임을 최대한 단순하게 설명해 보면 이렇다.
극심한 추위로 인해 죽음의 위기에 몰려있는 상황이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자원을 모아 발전기를 돌려 추위를 견디고, 식량을 모아 생존해야 한다. 동시에 기술을 발전시켜 더 큰 추위와 위협을 대비해야 한다. 플레이어는 지도자로서 시민과 사회의 생존이 달린 중요한 결정들을 계속해 나간다. 시민들의 희망과 불만을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미션으로 주어지는 특정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메타크리틱 평가 :
80 중반의 좋은 점수를 받았다. 스팀 평가 역시 '매우 긍정적'이다.
같은 경영 시뮬레이션 장르의 작품은 꽤 있지만 이 작품은 비교 불가다. 심오한 설정, 몰입하게 만드는 그래픽과 분위기, 희망-불만/생존-효율 사이에서 계속된 선택을 해야 하는 게임 플레이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게임이다.
1. 엄중한 선택의 경험
이 게임은 생존을 위해 경영·건설을 해야 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추위, 굶주림, 반란, 계급갈등, 예기치 못하게 벌어지는 사건·사고를 실시간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황은 선택을 요구한다. 다양한 상황이 있지만, 본질적인 딜레마는 이렇다.
"다수의 생존을 위한 현실적 이익" vs "소수의 안전과 인권보장"
누구나 정의에 대한 자신의 평소 생각이 있을 것이다. 머리로는 그 생각대로 살려고 하겠지만 현실에서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심지어 극한의 상황이라면 생각과 선택을 일치시키기 매우 어려워진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계속해서 한 방향으로만 선택하기 매우 힘들게 밸런스가 잡혀 있다. 선한 지도자가 되고 싶어 계속해서 소수의 안전과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의 선택을 하면, 시민들의 '불만' 수치가 커쳐 탄핵을 당하고 쫓겨날 수도 있다. 반대로 다수의 생존을 위해 현실적인 이익만을 쫓다 보면, 시민들의 '희망' 수치가 낮아서 마찬가지로 탄핵을 당하고 쫓겨나게 된다.
게임에 몰입하게 하는데 여러 요인이 작용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래픽이 만드는 분위기다. 이 게임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몰입하기에 충분하다. 보기만 해도 추워진다. 내가 지도자인 이 국가에서 시민들이 추워하면 마음이 아프다. 조금만 마음을 열고 이 게임과 만나면 몰입하기 어렵지 않다. 몰입한 상황에서의 엄중한 선택의 경험은 진정 '시뮬레이션'이라 할만하다.
2. 인간에 대한 이해
스토리텔링 장르 중 하나로 종말물(아포칼립스물)이 있다. 문명과 인류가 멸망하는 모습을 그리는 장르이다. 나는 이 장르를 특히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극한 상황에서는 인간성이 더 극대화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위기 상황에서 대다수의 인간들은 이기적이고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어려운 상황에 발휘되는 우정과 사랑이 더욱 극적인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에게는 각기 다른 '이름'이 있다. 주요 등장인물만 그런 게 아니라 수백 명 모두가 그렇다. 노동자, 연구자, 어린이 카테고리에 숫자만 붙여도 게임 진행에는 큰 차이 없었을 것이다. 굳이 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이름 없는 통치 대상 수백 명 중 하나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임을 보여주는 연출이라고 느꼈다.
생존을 위협받는 극한 상황이라고 해서, 인간의 다양한 욕구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추위와 굶주림만 없다고 해서 인간이 살아갈 수는 없듯이, 계속해서 새로운 요구가 등장한다. 의식주를 넘어 아동보호소, 선술집, 공동묘지, 격투장, 매음굴 등에 관련된 법령을 제정하고 건물을 지어서 정신 건강을 신경 써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사회 통치의 방향성을 결정해야 한다. 불만을 억누르는데 유리한 '질서와 규율' 루트, 희망을 퍼뜨리는데 초점이 맞춰진 '신앙과 정신력' 루트가 있다.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최대한 단순화시켜 핵심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다. 이 게임이 인간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얘기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 게임의 설정과 연출은 심리적,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3. 긍정적인 목표
2018년, 청소년들과 함께 보드게임 회사에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기준으로 한 해 한국에서 출시되는 보드게임의 수는 1년에 300여 개였고, 전 세계적으로 30,000여 개라는 얘기를 들었다. 모바일, PC, 콘솔 게임의 수는 보드게임보다 또 몇십 배 많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게임 콘텐츠는 적어도 수백 개는 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대다수 게임의 목표는 경쟁에서 승리하기이다. RPG나 어드벤처 게임의 경우는 경쟁에서 승리라기보다는 정해진 스토리를 클리어하는 게 목표인데, 아무리 주인공이 정의를 위해 일하는 선한 캐릭터라 할지라도 폭력을 동원해 난관을 극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게임은 목표 자체가 다르다. 사람을 살리는 게 목표다.(미션 중에는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식물 종자를 살리는 것도 있다) 물론 과정에서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포기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베드엔딩을 보게 된다. 굿엔딩을 보기 위해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
이 게임을 만든 개발자들이 제시한 도전 과제(트로피) 또한 마찬가지다.
- 모든 약속을 지키면서 시나리오 완료하기
- 심각한 법령을 제정하거나 가혹한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시나리오 완료하기
- 추위, 허기, 질병, 과로로 인한 사망자 없이 시나리오 완료하기
등등이 있다. 베드엔딩이든 굿엔딩이든 깨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해 보면 알게 된다. 굿엔딩으로 클리어했을 때의 감격은 굉장하다.
세상에 게임은 매우 많다. 그러나 폭력을 지양하고 협력을 통해 긍정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게임은 거의 없다(유아용 게임을 제외하고) 이 게임은 매우 특별한 이유다.
- 초보자는 할 수 없다 : 쉬움 난이도로 하더라도 시나리오 하나를 클리어하는데 적어도 5시간 이상 걸린다. 게다가 사전에 게임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시나리오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중간중간 어떤 목표가 제시되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게임은 찔끔 시도해 보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반복된 연습과 도전이 있어야 열매를 딸 수 있다.
- 나쁜 독재자를 합리화할 수도 있다 :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대하고, 많은 사람을 희생하는 방법으로도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수는 있다.(베드엔딩이지만) 목적만 달성한다면 그 과정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게임이 가지고 있는 여러 교육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재미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정도의 몰입감이 있다
- 한 판이 길다 보니 끊었다가 다시 할 때 진도를 까먹는다
교육적 ★★★★★
+ 인간에 대한 이해, 조직운영의 어려움에 대한 강렬한 간접 경험이다
- 인간과 세상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기에 적어도 15세 이상은 돼야 할만할 것 같다
접근성 ★★★☆☆
+ 안드로이드, iOS로도 출시 예정(얼리액세스 중) 폰이나 태블릿으로도 킬링타임용이 아닌 교육적인 게임을 할 수 있다!
- 경영, 건설 시뮬레이션 장르에 대한 흥미가 필요하다. 롤이나 FPS게임만 익숙한 학생들에겐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교육적인 상업게임'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개발사가 이 게임을 만든 11 bit studio이다. 이 회사는 '디스 워 오브 마인'으로 알려지게 됐는데 이 게임 또한 명작이다. VR, AR을 쓰지 않고 게임이 줄 수 있는 최대의 간접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게임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민간인들에게도 전쟁이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 느낄 수 있다. 이런 교육적 내용을 인정받아 폴란드에서는 중고등학생의 교육 자료로 등록되기까지 했다. (링크)
디스 워 오브 마인으로 11 bit studio의 팬이 된 내가 2번째로 플레이한 이 개발사의 게임이 프로스트 펑크였다.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이 게임은 내가 가장 단시간에 가장 많은 시간을 플레이한 게임이다. 5월 말부터 7월 말까지 두 달 동안 250시간을 했으니, 정말 역대급으로 밀도 있게 했다. 이 정도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주아주 재밌기 때문이고 이렇게 소개의 글까지 남기는 이유는 정말 정말 교육적이기 때문이다. 모바일 플랫폼으로 나오게 된다면 실제 수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획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