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에 관해 매번 다짐하는 마음은,
아이들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자는 거다.
잘 성장하고, 주어진 분량만큼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거면 되지 않을까.
갖지 말아야 할 것이,
아이들의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기대만은 아니다.
이루지 못한 꿈을 아이들을 통해 실현하려는 투영,
내가 정한 삶의 기준이 아이들이 스스로 정한 그것보다 우월할 것이라는 편협.
그러한 '나의' 욕망과 '나의' 사고가 그득그득 응집된 꿈을 한껏 반영한 육아가,
현실적으로 아이들에게 잘 적용될 거라는 착각들을 모두 포함한다.
이렇게 뒤틀린 정서들로 융합된 생각들이
좋은 방향으로 유지되어 좋은 열매로 구체화될 거라는 믿음은
그 자체로 허황하다.
아이들은 나와 다른 또 하나의 우주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내 가치관과 부합한 삶을 살 이유가 없다.
나를 부양할 의무와 책임은 더더욱 없다.
아이들을 이 땅에 소환한 건 나와 내 아내의 바람이었다.
우리의 일상에 아이가 더해지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우리가 늙게 되면 우리는 무얼 하며 무얼 보며 행복할 수 있지?
우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노년의 어느 한 자락을 예견하며 지레 겁을 먹지 않았었던가?
아이가 필요한 건 우리였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 땅에 불려 왔을 뿐이다.
이 아이들이 온전한 행복감을 누리며 살 가치가 있는 세상인지를 가늠해 보면
어쩌면 아이들에게 죄를 지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 부부는 철저히 이기적이었다.
아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맞이할지도 모를 숱한 고통들은 애당초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자신들을 불러내겠다는 우리의 생각에 찬성했을까?
무의식 속에 잠재된 유전자의 강력한 명령인지,
노후를 보장받겠다는 다분한 생존본능인지,
고착화된 사회의 규범에 충실한 역할 모델이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이들은 죄가 없다는 것, 그리고 어떤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호혜적 관계가 아니다.
'충'도 그렇지만 '효'라는 유교적 가치 또한 적어도 나에게는 기만이다.
아이들은 그저 부모와 주변 어른들이 주는 일방적 사랑에 행복에 겨울 권리만 있다.
첫 아이를 낳고 한동안 이 문제로 괴로웠다.
내가 이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마침 요즘 시대는 저출산 문제로 연일 심각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지옥 같은 삶을 내 아이에게 줄 바에야
현생의 고통은 당대에 끝내겠다는 청년들의 생각들이 눈에 많이 띄는 것을 보면
나만의 고민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이 세대는 출산을 선택의 문제로 인식한 유일무이한 세대다.
노비가 노비를 낳고, 총알받이가 총알받이를 낳고, 황국민이 황국민을 낳고,
전쟁통에도 아이는 낳아야 했던 선조들의 강한 번식욕을 생각하면
전에 없던 지금의 가치관은 사뭇 놀랍고 기이하다.
어쩌면 사회 구조 변화나 혜택 따위로는 손도 못 댈 거대한 물결 같은 인식 변화 같기도 하다.
이 세상을 내 원래 생각보다 과장되게 비관적으로만 몰아간 듯도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어느 정도 해법을 찾았다는 것이다.
하늘거리는 영의 상태로 살아가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부름에 이끌려 피곤한 현생을 살다가,
다시 무로 돌아가는 게 보편적 이치라면, 그야말로 끔찍하다.
하지만 우리 부부와 내 아이들에게는 현생만이 아닌 내세가 있다.
현생이 행복하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인 거고,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해도 잠깐 견디면 그뿐이다.
무든, 무화이든, 어쨌든 무의 상태로 존재(?) 하기보단
약속된 내세를 보장받아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까짓것 견뎌봄 직도 하다.
아이들이 설득될 수 있을까 싶은 빈약한 논리지만,
내 인지부조화를 방어하는 데는 충분하다.
다른 건 전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생각할 능력도 없다.
그저 아이들과 함께 오래도록 행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