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의 대표 격으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는
인간성이 증발해버린 사회가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인류는 다른 개체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합리적 이성을 가졌고, 또 그것을 맹신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유례없는 진보를 이룩해 갔다.
하지만 전쟁은 점차 광폭하고 맹목적으로 흘러갔다.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인간이 저지른 일이라기엔 너무나 비상식적이고 무모했다.
전쟁이 끝나고 남은 것은 파괴의 흔적과 겹겹이 쌓인 시쳇더미뿐이었다.
전쟁의 참상은 사람들에게 '인간이란 정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인가'라는 의구심을 던졌다.
그리고 깊은 허무주의를 안겨주었다.
유대인들은 증오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인 의도로 그곳으로 붙들려 왔다.
뿌리 깊은 종교적 편견도 한몫했다.
여러 소수 민족과 장애인들은 혈통이 고귀한 민족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기엔 유전자가 너무 저급했다.
죽어 마땅한 사상을 가진 예술가, 정치가, 반체제 인사들, 전쟁 포로 등도 이 죽음의 대열에 합류해야 했다.
그리고 저비용 고효율의 가장 경제적인 방식으로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
살육 현장의 냄새와 피부에 서리는 습도와 온도, 공중에 부유하며 온몸을 감싸는 눅진한 살기는
직접적인 체험자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피상적인 공포이고 비현실적인 우화에 불과하다.
헤더 모리스가 쓴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는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있었던 수용자들에 대한 학대와 참상을 실화를 바탕으로 소개하고 있다. 주인공인 랄레와 그의 연인 기타도 실존 인물이다.
작가인 헤더 모리스는 노인이 된 랄레에게 3년 동안 찾아가 인터뷰 요청을 한다.
랄레로서는 억압적 상황이긴 했지만 나치에 협조했다는 점에 대한 엄격한 자기반성을 요구했기에 인터뷰에 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트라우마로 점철된 그날의 기억을 다시 조목조목 파헤쳐 꺼내 올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힘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수용소에서 처음 입소하는 수용자들의 팔에 식별 번호를 문신하는 일을 담당했다.
여자와 노인,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그곳에 들어오는 모든 인간의 팔에 거칠게 상처를 입히고 잉크를 스며들게 해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었다.
같은 수용자들 사이에서는 나치에 협력하는 부역자로 여겨지는 업무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수용자들을 바라보는 것은 랄레에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기에 랄레는 어쩔 수 없이 그 업무를 수용한다.
대신 랄레는 문신가에게 주어지는 얼마간의 특혜를 독점하지 않고 동료들과 나누며 배려하고 희생한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모두를 구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수용자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과 같은 고향 슬로바키아인인 기타라는 여자와 만나 이내 사랑에 빠진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랄레와 기타는 삶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악착같이 생존해 나간다.
결국 독일이 러시아에 패하며 전쟁은 막이 내리고,
랄레와 기타도 수용소를 가까스로 빠져나와 꿈에 그리던 결혼을 하게 된다.
소설은 나치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고발한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을 이겨내고 사랑의 결실을 이루게 되는 두 인물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냈다.
아침에 살아서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안도해야 하는 수용소에서 죽음은 너무나 하찮고 흔한 것이었다.
죽을 이유는 수없이 많았고, 랄레와 기타에게도 죽을 위기는 수시로 찾아온다. 죽을 위기를 하나씩 넘길 때마다 둘은 서로를 껴안고 키스하며 수용소 생활을 마친 후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삶의 의지를 다진다.
하지만 생존에 성공한 그들에게 감동하면서도, 한 편의 찜찜함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죽을 수 있는 모든 위기마다 운이 따르지는 않았던, 수백 만 명의 죽음이 너무나 무겁고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욕구가, 살아야 할 이유가 랄레와 기타에게만 간절한 것은 아니었다.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영화나 소설은 많다.
작가들은 자신의 체험 또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나치의 잔학상을 고발했다.
가해자들은 작품을 통해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눈물로 속죄하며 부끄러운 역사를 참회한다.
돈 되는 서사를 찾는 작가들의 작품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그들은 아픈 역사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각색하기도 하고 새롭게 꾸며내기도 한다.
그 작가들에게 전쟁은 인간의 원초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훌륭한(?) 소재이다.
죽음, 공포, 강압적 성, 억압적 상황에서 공황 상태에 빠지며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모습은
사디스트들에게 쾌감을 준다.
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쾌감을 느끼는 자신을 인지하며
고상한 인간이라는 스스로 부여한 지위에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래서 휴머니즘과 인간애를 활용한다.
영리한 홀로코스트 작품은 사람들에게 학대받는 유대인을 보며 '쾌감'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할 줄 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양면적 속성이기도 하다.
전쟁을 소재로 한 상업 예술과,
인간성 회복을 도모하고 전쟁을 규탄하는 참여 예술의 구분은 쉽지 않다.
구분에 필요한 객관적 기준과 구분의 실익도 없을뿐더러 작가의 내적 동기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예술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판단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판단이든 나름의 효용은 있다.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는 '극한' 그 자체보다 '극한 속에서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주목한다.
극한의 상황이 랄레와 기타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마지막까지 견지하게 한다.
장난치듯 죽음을 뇌까리는 지배자들을 혐오하게 하고,
간접적으로 체험한 전쟁의 상황이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는 일군의 사람들을 통해
다시 한번 상실해 버린 듯한 인간성을 확인하게 하고 감동하게 한다.
순수 예술과 진정성을 떠나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문학의 효용이란 따지고 보면 그런 것일 테니까.
언어는 결코 현실을 담을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을 진득하니 머금은 언어가 주는 강한 힘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하게 한다.
오늘날의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의식은 끊임없이 진보한 듯 보이지만 마냥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인간이 얼마나 몰이성적이고 무비판적인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낀 지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먼 과거인 듯 보이지만 불과 백 년도 안 됐다.
인간은 탐욕과 이기가 내재된 존재이다. 존엄과 인권 따위는 얼마든지 사소한 그 무엇과 쉽게 맞바꿀 수 있다.
무엇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지켜줄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