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어느 날 아침이었다. 티브이를 켜니 뉴스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일본 동북부의 태평양 해상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어지는 속보를 보니 지진의 규모나 피해가 심상치 않았다. 일본이야 원래 지진이 많은 나라니 일상적이지는 않더라도, 대단히 특별한 일도 아닐 거라고 치부했던 마음이었을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 후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게 된 구체적인 상황은 심각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대한 힘은 지면을 멱살 잡듯 움켜쥐고 마구 흔들어 댔고, 집채만 한 파도가 해안가에 밀집된 인가와 건물들을 청소하듯 쓸어버렸다. 그날에 대한 지나치게 생생한 묘사는 마음속에 진득한 텁텁함을 남겼다.
이 사건의 여운은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내가 직접 체험한 일이 아닌데도 그 상황이 주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을 것이다. 공포 영화를 본 후, 존재하지도 않는 귀신 때문에 한동안 마음이 싸하던 느낌. 사실적으로 묘사된 살인 사건 뉴스를 보고 나면, 며칠간은 등 뒤가 서늘해서 밤에 돌아다니기도 찝찝하던 기억. 2011년의 대지진이 나에게는 그런 경험이었다.
그해 9월 나는 도쿄로 떠나게 되었다. 살면서 처음 하는 해외여행이었다. 도쿄의 모습은 에너지와 활력이 넘치는 곳이었고, 생각보다 어수선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도쿄는 지진이 발생한 곳에서 대략 250km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반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무렵이기도 했을 터이다. 무엇보다 자부심 강하고 내향적인 일본인들이 재해의 트라우마를 관광객에게 손쉽게 내보일 리도 없었을 것이다. 도쿄에 다녀온 후 오랫동안 여행의 여운에 시달렸다.
그 이듬해 나는 또다시 고베로 떠났다. 이번에는 제법 긴 일 년의 여행이었다. 일본에서 내가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랬다 한들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이 지긋하신 단골 치과 의사 선생님은 돈 모으고 결혼하기도 바쁜데 무슨 여행을 그리 길게 가냐며 핀잔하셨다.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저 이유 모를 강한 끌림에 반응할 뿐이었다.
고베에서의 생활은 여행자라기보단 노동자에 더 가까운 삶이었다. 어학교에서는 오전이면 수업이 모두 끝났고, 나머지 시간은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돈이 충분하지 못해 여러 개의 일을 병행하다 보니 몸은 축축 처졌고, 생존의 압박감은 무거웠다.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날이면 주변 곳곳을 돌아다니며 우리와는 사뭇 다른 일본의 공기와 분위기를 즐겼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일찍 눈이 뜨였다.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믹스 커피를 한 잔 마시는데 갑작스레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 그럼 나가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그냥 무조건 교토다. 교토는 여러 번 갔던 곳이지만 갈 때마다 새롭게 느껴졌고, 아침부터 내리쬐는 햇살의 농도가 교토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예정에 없던 나들이가 급하게 계획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대충 소지품을 챙기고 밖으로 나섰다. 아침에 일어나 문득 교토 여행을 간다니, 이런 간지(?) 나는 삶이 또 있을까 싶어 가난한 노동자 주제에 인생이 너무나 충만하게 느껴졌다.
고베의 산노 미아역에서 한큐 전철을 타고 약 한 시간을 달려 교토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하루 동안 무제한으로 버스를 탈 수 있는 티켓을 끊고 제멋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날 찍었던 사진을 보고도 그곳이 어딘지 기억이 나지 않는 무념무상, 무계획 그 자체였다. 느낌만 좋다면 그곳이 어디든 버스에서 내려 그곳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당일치기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예배는 드려야겠어서 구글맵을 켜고 교회를 찾았다. 가장 가까워 보이는 교회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라쿠 사이 교회’였다. 도착했을 때는 예배 시간을 조금 넘겼던지 목사님의 말씀이 시작된 후였다.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설교 중인 목사님의 눈이 나를 보더니 휘둥그레진다. 교회가 있던 곳은 교토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낯선 이의 방문이 많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목사님이 한달음에 나에게 달려오셨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새 신자였을 텐데 하필이면 잠깐 스쳐가는 사람이라니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간단한 내 소개를 하며 관광 중에 우연히 들렀다고 하자, 그래도 너무나 반갑다며 환대를 해주셨다. 다른 말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몸 건강하게 관광 잘하고 가라는 말은 확실하게 들렸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어떤 청년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십 대 청년이었다. 신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기독교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은 이곳에서 일본인 신학생을 만나게 되다니 참 묘한 느낌이 들었다. 웬일인지 오랫동안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 작년에 있었던 지진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 그에게 얘기했다.
“지진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서 안타까웠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했어요.”
내 말이 끝나자 당황스럽게도 그의 눈이 단숨에 시뻘게지더니,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희생당한 그들을 위해 기도해 줘서 너무나 고맙다며 나에게 연신 허리를 숙였다. 그 청년이 그 말에 대해 고마워할 이유가 따로 있었을까. 설령 그렇대도 그 말이 청년에게는 눈물까지 흘릴 정도의 말이었을까.
내가 그 청년에게 했던 말이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깊이 들어가 공감하려 했던 이야기도 아니었다. 어쩌면 내 맘 한편에서 지진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사건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본인인 그에게는 그 이야기를 단순한 이야깃거리로 여기기엔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상처였을지도 모르겠다. 사고가 일어났던 후쿠시마와 한국 땅의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이곳 청년이 흘렸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난 해맑았던 그의 웃음과 눈시울을 붉히던 순간 함께 붉어지던 그 뺨을 잊지 않고 문득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오사카 어딘가 자신의 집 주소와 함께 메일 주소를 쪽지에 적어 주며 꼭 찾아와 달라던 그 말과 표정의 잔상이 십 년이 넘은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뚜렷하게 박혀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다시 끄집어낼 때면 대지진이 발생했던 날, 다니던 교회의 부목사가 나에게 내뱉었던 말이 함께 떠오른다.
“일본인들은 하나님을 안 믿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아마 구원받지 못했을 거야.”
하나의 사건을 접하고도, 사람들의 언어는 두 가지로 갈린다. 심판의 언어와 치유의 언어, 망나니의 언어와 마더 테레사의 언어, 무가치한 언어와 유의미한 언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살아가면서 꽤 중요한 문제이다. 입으로 꺼내는 언어는 말 이전에 인격의 문제이고, 인격에서 비롯한 태도는 내면의 질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인간의 본성에 근간을 두고 있다.” 고 얘기했다. 한 사람이 구사하는 문장의 격이 곧 그 사람이 가진 품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우리가 정말 신경 쓰며 살아가야 하는 건 나의 근본과 내면을 가꾸고 돌보는 것이 아닐까. 그 청년과 부목사가 구사했던 언어 선택과 태도의 극명한 대비는 좋은 인간이 가져야 할 품위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신학생 청년과의 만남이 필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남이 이루어지기까지 정말 다양한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지진이라는 하나의 사건, 그것을 대하던 순간의 마음의 동요, 여행지를 결정하고, 버스에서 내릴 곳을 정하고, 식사할 시간을 선택하고, 가까운 교회를 찾오보던 하나하나의 상황과 선택들. 이 모든 것들이 빈틈없이 청년을 만나는 데 일조했다. 그러한 기가 막힌 우연이 겹치고 겹쳐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인상 깊은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는 지금쯤 훌륭한 목사가 되어 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청년과의 짧은 만남은 나에게 변하지 않는 방향성을 던져주었다. 삶이 팍팍해 내 마음이 조급하고 여유가 사라질 때, 마음이 뒤틀리고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천박해진다 싶을 때면, 자연스럽게 진심 어린 마음으로 말을 골라내고 표현할 줄 알던 그 청년을 떠올리게 된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스스로 빛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던 그는, 여전히 일본 땅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고 살리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