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간다는 것은, 달아진다는 것

사랑의 표현과 성숙함에 대해

by 감격

퇴근한 남편이 내게 말을 건넸다.

"어머니가 감이랑 고구마 부쳐주신다는 거, 조만간 내려간다고 했어."

조만간이라는 단어는 늘 그랬다.

일정과 사정을 핑계 삼아 시간을 미루는 완만한 표현이었다.

명절이 막 지나고, 아이들 스케줄이 주말마다 얽혀있으니

달력의 빈칸을 찾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남편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은 지 채 며칠이 되지 않은 토요일 연락이 왔다.

큰 시누가 일요일 아침 들른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길도 아닌데 굳이 감과 고구마를 전하러 오신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쪽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택배로 그냥 보내셔도 되는데 굳이 2시간을 돌아서 오셔야 하나.

조만간 내려간다고 말씀드렸는데 왜 이렇게 서두르시지.

'굳이'라는 말이 속에서 몇 번이나 맴돌았다.


남편은 주말에도 일이 있었다.

살갑지 못한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무엇을 대접해야 할지 종일 마음이 분주했다.


다음날 일찍부터 아이들과 함께 주차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큰 시누는 서둘러 박스들을 내려놓았다.

"감이 아주 잘 익었더라"

그 한마디를 남기고, 붙잡는 나를 토닥이고 인사한 뒤 서둘러 떠났다.

차가 멀어질수록 박스의 무게가 더 묵직해졌다.


대봉시는 서로 기대듯 차곡차곡 놓여있었다.

몇 개는 아주 잘 익어 말랑했고, 나머지는 단단하지만 곱게 빛났다.

고구마는 흙냄새가 났고,

김치통의 보자기를 풀자마자 아이는 "맛있겠다"는 말을 했다.


조만간 내려가면 되겠지라며 미뤘던 시간 동안

감은 익어가고 있었고 김치는 맛이 들었다.

그 마음은 나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마음은 때로 비효율에 가깝다.

직접 들고 오느라 기름과 시간을 쓰고,

차 한잔 할 틈도 없이 서둘러 떠난다.

하지만 그 '굳이' 덕분에 마음이 도착한다.


편리함으로 잘 포장된 택배라면

감은 상자 안에서 뒤섞였을 것이다.

물건은 도착해도,

마음의 온도는 미처 스며들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며 번거롭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경제가 어렵다는 뉴스를 들으셨을 부모님이,

아들과 며느리가 힘들어도 말 못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 걱정을 편지 대신 박스에 담아 보내신 것이다.


나는 그 배달을 '수고'로만 이해했고, '부담'으로 느꼈다.

이제야 그 깊은 마음을 열어본다.


감을 좋아하는 큰아이는 제일 말랑한 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감 말랑해서 더 달아, 맛있어"

그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익는다는 것은 단단함을 잃어가는 일일지 모르지만,

그 잃어감 속에서 단맛이 더해진다.

부모의 사랑도 그렇다.

서로의 단단함이 서로 말랑해질수록, 서로에게 더 달콤해진다.


익기 직전의 감 몇 개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조금 더 익으면 옆집에도 나눠야겠다.

아마 그런 의미로 더 가득 보내주셨을 테니.


감사 인사를 드리려 전화를 걸었다.

'다음에는 저희가 내려갈게요'라는 말에

바쁘면 괜찮다는 어머니 말에 조용히 다짐했다.

불편함을 핑계로 정을 미루지 않겠다고.


친절은 말을 이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째로 내어주는 일이다.

배려는 선물을 준비하는 센스가 아니라

그 선물을 건네기까지 고민하고 준비한 마음이다.


아직 어른이 다 되지 못한 나에게,

가을에 받은 그 박스는

어른의 세계를 보여주는 한 권의 책이었다.


사랑의 마음도 감사의 마음도 천천히 무르익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