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에도 우선순위가 필요하다.
왜 기준은 늘 모호한가
살면서 자주 마주치면서도 어려운 질문 중 하나가 있다.
"어떤 선택이 옳은가?"
우리는 매일 수많은 결정을 내린다.
사소한 아주 작은 것부터 인생의 중대한 큰 결정까지.
결국 그 모든 선택은 어떤 기준 위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기준이란 것이 늘 뚜렷한 것은 아니다.
분명해 보이지만 막상 당사자가 되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아이를 훈육하거나, 회사에서 동료와 협업할 때,
혹은 가족 문제로 다툴 때조차 우리는 끊임없이 기준을 들이민다.
"이렇게 하는 게 옳아, 저건 아니야"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그 기준은 바뀌거나 흐려지기도 한다.
어제는 분명 옳다고 여겼던 것이 오늘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는 그 모호함이 늘 어렵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기준의 뿌리
사전에서 '기준'을 찾아보았다.
기(基): 집을 세울 때 놓는 주춧돌, 기초.
준(準): 물 수평계처럼 바르게 맞추는 잣대.
즉, 기준이란 흔들리지 않는 바탕 위에 세운 것이란다.
곧바로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 주춧돌은 어디에 놓아야 하는가?
어떤 집을 지을지, 설계도는 어떻게 그려야 할지, 집을 짓는 사람의 가치관과 목적은??
끝없는 질문 속에 현재 답변은, '저마다 다르다'이다.
그래서 같은 단어, 같은 정의를 가지고 있어도 각자 다른 기준 위에 산다.
결국 기준은 단순한 정의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것 아닐까?
현실 속에서 흔들리는 기준
얼마 전 SNS에서 아동심리 전문가가 들려준 이야기다.
고개를 끄덕인 부분이 많아, 오랫동안 팔로잉을 해 온 분이었다.
일찍 나간 아이가 친구를 기다리다 지각을 했고,
엄마가 선생님께 아프다고 연락하지 않으면
미인정 결석으로 처리될 상황이었다.
여기서 미인정 결석이란,
서류를 낼 수 없는 본인의 사정으로 인한 무단과 같은 결석으로
특히 중고등학교에서는 쌓이면 생기부에 기록되기에
입시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설문조사의 결과는
"원칙대로 지각 처리 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리고 실제로 아이의 친구들은 모두 거짓 진료 기록을 제출하였지만,
해당 아이만 미인정 결석으로 처리가 되었다.
이후 달린 댓글은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입시에 불이익이 될 수 있으니 융통성 있게 처리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기준이 드러났다.
도덕적 기준: 원칙은 원칙, 지각은 지각으로 처리할 것.
현실적 기준: 아이의 미래를 위해 불이익은 피할 것.
둘 다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모순된다.
나에게 그런 상황이 닥쳤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원칙? 아니면 현실? 솔직하게 확신할 수 없다.
철학과 심리학에서의 기준
이런 고민을 나만 한 것은 아니었는지 철학과 심리학을 찾아보았다.
칸트는 도덕을 설명하면서 "정언명령"을 강조했다.
상황과 결과에 관계없이, 마치 법칙처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거짓말하지 말라"."약속을 지켜라"와 같은 규범이 대표적이다.
칸드라면 분명, "지각은 원칙대로 처리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반면, 발달심리학자 피아제는 아동의 도덕 판단 과정을 연구하면서,
아이들이 처음에는 규칙을 절대적으로 여기다가,
성장하면서 점점 상황과 맥락을 고려하는 쪽으로 변한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규칙은 무조건 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와 상황 속에서 재해석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관점 모두 일리 있지 않은가?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이 둘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기준 앞에서 흔들린다.
기준에도 우선순위가 필요하다
내가 현재 시점에서 얻은 하나의 결론이다.
기준이란, 결국 두 개의 층으로 나뉘어야 한다.
1. 흔들리지 말아야 할 기준
인간 존엄, 안전, 기본적인 예의처럼 어떤 상황에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이의 안전 앞에서는 규칙보다 보호가 먼저인 것.
2. 상황에 따라 조정 가능한 기준
효율, 편의, 제도적 규칙처럼 맥락에 따라 달리 적용될 수 있는 것.
예를 들면 약속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게 원칙이지만,
갑작스러운 교통 상황이나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고 같은 불가피한 상황은 늦을 수 있는 것처럼.
문제는 우리가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모든 것을 절대화하면 삶은 경직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하면 삶은 무너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가 아닐까.
끝까지 지켜야 할 것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풀어갈 것을 나누어야 한다.
사회의 기준, 개인의 기준
더 어려운 것은 사회적 합의다.
공동체는 늘 어떤 기준을 '다수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데 요즘은 '도덕적 옳음'보다는 '효율적 이익'쪽으로 무게가 기울어지고 있다.
입시, 취업,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규칙은 자꾸면 결과를 위한 도구로 바뀐다.
물론 이 변화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기준이란 본래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결과를 위한 계산기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회의 흐름을 탓하며 손을 놓을 수는 없다.
결국 기준은 공동체와 함께 공유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나 자신의 몫으로도 남는다.
나의 기준은 어디에
나는 자꾸 묻게 된다. 나는 어떤 주춧돌을 놓고 있는가?
무엇을 끝까지 지켜야 하고, 무엇을 내려놓아도 괜찮은가?
아이를 키우며, 가족과 살며, 글을 쓰며
나는 매 순간 이 질문 앞에 선다. 대답은 여전히 어렵다.
어제의 답과 오늘의 답과 다르기도 하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무너지는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준은 누구에게나 고정된 답안지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토대 위에 세운 유연한 잣대라는 점이다.
주춧돌이 단단하다면,
그 위에 세운 집은 상황에 따라 벽을 바꾸고 창을 내어도 무너지지 않을 테니
여전히 모호한 결론
나는 오늘도 물음표다.
"나는 어떤 기준 위에 내 삶을 세우고 있는가?"
아직 답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모호함 속에서 나의 기준은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결국 알게 된다.
기준 없는 삶은, 머물 곳 없는 길과 같다는 것을.
우리는 각자, 어떤 기준을 잡고 살고 있을까?
저는 불완전한 삶의 과정 중에 있습니다.
서툴고 부끄러운 글 속에서도 저만의 중심을 세워가며,
주어진 칸을 하나씩 메워가고 있습니다.
이 귀한 시간이 여러분과의 다정한 사색으로 머물기를,
그리고 오늘 하루가 특별한 맛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글의 끝자락에,
용서와 감사의 마음을 올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