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새
지난 주, 일다에 글이 올라갔다. 일다에서 감사하게도 이 브런치를 읽고 원고 요청을 주셨던 지라 감자국퀴어를 시작한 게 보람이 있구나, 새삼 느낀 기회이기도 했다. 봄이니만큼 ‘축제’라는 소재로 지방 – 퀴어 – 페미니스트를 다뤄낸 이야기였다. 칼럼/에세이를 쓰는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지면을 제안 받은 거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고, 그래서 담당자님과 편집본을 주고받을 때 왕창 설렜다.
몇 시간 후, 내 칼럼은 일다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갔고, 메인 배너에도 걸렸다. 일다 트위터 공식 계정에 소개 글이 올라온 걸 발견해서 얼른 접속했다. 회사 모니터에 몰래 기사를 띄워놓고 재빨리 글을 훑었다.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잘 써졌는지, 오타나 비문은 없는지, 사진은 깨져 보이지 않는지 매의 눈으로 노려보며(사실 작가가 아무리 열심히 들여다봐도 자기 글 문제를 전부 찾아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스크롤을 열심히 내렸다. 다행히 끝까지 읽었는데도 일다에서 꼼꼼히 봐주신 덕에 별다른 문제는 발견하지 못했다. 안심한 상태로 여분이 남아있는 스크롤을 끌어내렸는데, 세상에! 악성 댓글이 달려있었다! 글이 올라간 지 1시간 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디서 사람들이 귀신 같이 내 글을 보고 악플을 달러 온 것이다. 이 정도면 퀴어에 대한 관심도가 퀴어보다 높은 것 같다.
성소수자가 더럽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저열한 말은 이미 10년 넘게 들어온 터라 크게 타격 받지도 않았고, 이 사람들은 내가 자기네들 고소하면 어쩌려고 이 난리일까 싶어 걱정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댓글로 내 외모 평가를 해놓은 걸 발견하고는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칼럼에 2008년에 찍었던 손목 사진(프라이드 뱅글을 차고 있다)을 넣었는데, 몇몇 한국 남자(추정, 줄여 쓰면 큰일 남)가 그걸 보고 내가 비만이라는 걸 바로 눈치 챈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고도로 각성한 비만 탐지기라니. 너무나도 경이롭고 무가치하고 무용하지 아니한가. 외모 평가에 대한 상처보다는, 손목만 보고 누군가의 비만을 탐지할 수 있는 능력에 감탄했고 동시에 스크린에서 자주 보이는 여성 방송인들이 무척 걱정스러워졌다. 한 장짜리 손목 사진에도 이렇게 빠르게 날 선 공격이 내리꽂히는데 얼굴을 자주 내밀고, 보다 친근하게 대중에게 다가가는 방송인들이 받을 공격은 얼마나 혹독하고 저질일까.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로는 몸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않는다. 특히 사회인이 된 이후부터는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로는 직장을 잘 잡아서였을 수도 있고, 이 정도 나이 쯤 되면 대부분 남의 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걸 깨닫는 어른이 되어서일 수도 있겠다. 다닌 직장 중 가장 보수적인 지금 회사도 누군가가 내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득달같이 발언자를 비판하는 사람이 한 명 이상 있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라고 해봐야 요가 선생님이 ‘한새 씨는 손으로 버티는 힘이 좋다’는 건데, 이것도 정확히 ‘몸’에 대한 거라고 볼 수 없다.
안타까운 점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나이가 되어 누군가가 내 몸에 대해 말을 얹지 않아도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는 오랜 시간 강력한 힘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것도 특히 시민 구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방에서 자라면 더욱 그러하게 된다. 동이 아니라 읍면 단위에서 자란 나는 그 동네에서 가장 통통한 어린이였다. 동네에는 어른도 없었지만, 어린이는 더 없었다. 제일 위에 지어진 집부터 제일 아래 지어진 집을 다 털어도 어린이가 한 손에 꼽혔다. 학교에 가도 또래 중에 살집이 있는 어린이는 나랑 다른 동급생 둘 뿐이었는데, 그 아이는 키가 커서 나보다 쉬이 용서 받는 느낌이었다. 다들 뛰어놀 때 책을 읽으니 저렇게 살이 찐다는 얘기를 학교에서도, 마을 어른에게서도 들었다. 이 동네 뚱뚱이는 누구누구 집 딸이고 그 동네 뚱뚱이는 누구 집 딸이라는 게 무슨 소식처럼 돌아다녔으니, 대충 어떤 분위기였을지 알만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 나이에 처음 딸을 키우는 부모가, 움직이는 걸 절대적으로 싫어하고 단 것만 좋아하는 큰 딸을 향해 걱정과 자극이랍시고 퍼부은 말이 얼마나 모질고 독했을지 여러분은 마땅히 상상하실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던 어느 날, 문득 사방을 돌아보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 좁은 지하철 한 칸에 각양각색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단순히 나이나 성별 문제가 아니라 머리를 연보라색으로 염색한 사람, 찢어진 바지를 입은 사람, 빼빼 마른 사람, 배지와 와펜을 주렁주렁 단 사람, 휴대전화 버튼을 누를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손톱을 길러 가꾼 사람, 살집이 있는 사람, 보기만 해도 아찔한 하이힐을 신은 사람, 외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 등 다양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최소한 나에게 그건 제법 신기한 광경이었다.
지방으로 갈수록 ‘외모 다양성’은 절대적으로 좁아든다. 딸이 살집 있다는 것 하나로 온 마을이 떠들썩할 정도니 말해 무엇 하랴.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어떤 나이가 되면 갖추어야 할 마땅한 외양이 있는 것처럼 동네가 지켜보고 있다. 그 기준을 벗어나면 누군가는 반드시 지적하고 만다. 옷차림이나 머리 스타일도 그렇지만 인종 구성도 편협하기 짝이 없다. 시내에는 관광객 외에 거주 목적으로 살아가는 외국인을 찾기가 힘들었다. 지방에서 살 때 처음 봤던 외국인은 영어학원에서 날 가르쳤던 원어민 선생님뿐이었다. 그보다 나이 들고는 결혼 이주민 여성을 여럿 봤는데, 한국 특성 상 도심이 아니라 주로 산골 지역에서였다.
이건 ‘외모 코르셋’과는 또 다르다. 지방에서 사는 동안 보지 못 했던 고스로리 패션을, 수도권에서는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결혼식장을 지나다닐 때나 봤던 한복도, 서울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레깅스만 신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도, 코스튬 플레이에 가까운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도, 강원도나 충청도가 아니라 서울에 훨씬 많다. 어쩌면 고만고만한 서로를 보며 살다보니 그 외의 것을 상상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뜯어지고 찢어지고 구멍 나고 트여있는 옷을 좋아하는데, 가족 중 한 명이 내가 그런 옷을 입는 걸 두고 보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다.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해서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는데, 창피하니 벗고 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건 결국 그 동네에서는 찢어진 청바지를 남사스럽게 여긴다는 의미였고(물론 내가 비만인 것도 작용했을 거다), 그걸 입고 다니면 누군가가 나를 어떤 집의 구성원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쪽으로나 지방의 협소함을 보여주는 일화이지 않을까 싶다.
동네에 하나 있던 뚱뚱한 어린이는 커서도 살을 빼지 않았다. 대신 그곳을 떠나버렸다. 이제는 고향에 나 말고도 비만 여성이 있을까? 정해진 규격의 외모를 벗어난 사람이 활보하고 다니는 수가 늘어났을까? 지방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건 당연한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생각보다 여러 가지가 들어있다. 다양한 문화예술 경험이나 다양한 직업 경험 같은 건 결국 다양한 사람에서부터 나온다. 유입되는 사람을 배척하지 않는 것, 누군가의 시도를 존중하거나 때로는 차라리 모른체 해주는 것, 남의 외양이 내 존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인식하는 것. 같은 땅 밟고 살고 있다고 전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디 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
P.s 자기 홍보를 위해 일다 링크도 걸어둡니다. 많은 관심 부탁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