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우리, 그 애틋함의 기원에 관하여
여러 날을 공들여 세상을 만들어 낸 창조주는 어느 날 세상을 둘러보며 문득 생각했다.
무념의 상태로 무심히 살아가는 피조물들의 의미 없는 움직임에 의미 있는 한 방울 더해주고 싶다고..
그래서 늘상 내리던 빗물에 한 방울 섞어 내려 주었다.
‘나’라는 한 방울.
그날 이후 세상에는 또 다른 방울 방울들이 스스로 생겨나 온 세상에 가득 차게 되었다.
소중한 사람 한 방울, 사랑 한 방울, 추억 한 방울..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기원한 애틋함과 그리움의 방울방울... ‘나’의 존재가 파생한 그 방울 방울들 말이다.
‘나’가 생기니 알게 된 ‘우리’와 ‘서로’..
그러나 피조물들은 우리랄지 서로든지 하는 것을 영원히 쥐고 살 수는 없었다.
피조물들은 결국 애틋한, 때로는 절절한 그리움에 눈물짓게 되었다.
‘시간’의 마법 때문일까..?
세상에 ‘나’가 한 방울 떨어지기 전에는 존재를 드러내지 않던 ‘시간’.
그 시간의 의미가 이제 피조물들을 옥죄였다.
내가 있으니 또 ‘나의 끝’, 또 ‘우리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피조물 중 하나, 우리는 매일 아침 해가 뜨면 눈을 뜨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 듯..
태어나 ‘우리’라는 우리를 쳐 서로를 보담으며 살다 어느덧 서로의 손길을 놓아야 할 때에 결국 애통함과 애달픈 그리움에 사무쳐 죽음에 드는 숙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오늘의 ‘나’는 우리 생에 그 끝이 있음에도, ‘나’의 자각이 우리를 무리 짓게 하고 사랑하게 함에 감사하다.
영영 알지 못하고 의미 없이 스러지는 ‘무지의 슬픔’ 보다는 낫다 싶다.
그리고.. 그리고 말이다.
유한하니, 그러니 잠시나마 더 찬란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