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재발견

'그저 그런 상태'의 의미

by 감자밭

어릴 적 아버지를 관찰하며(그래, 이건 관찰이라는 게 맞을게다) 느낀 게 있다.

아버지는 무표정하거나,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저 그런 상태'였다는 것.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도, 모처럼 삼겹살 함께 할 때도.


광산에서 광부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갑반, 을반, 병반 이렇게 3교대 근무를 하셨는데, 어느 때가 되었건 퇴근하시면 밥상에 앉아 큰 대접에 냉 보리차 한 대접 들이키시고는 말없이 밥술을 뜨셨다.

술도 잘 안 드셨고, 물론 말씀도 없으셨다. 가끔, 아주 가끔 "핸도이(내 이름이다. 경상도식..) 오늘 뭐 했나?"하고 아들 동향에 살짝 관심을 표하는 정도, 이 이상의 대화나 표현은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 아부지 사는 게 별로 재미없으신가 보다..'


엄마가 경상도 남자 말도 없고, 재미도 없고, 고집도 세다고 '혼잣말'로 다 들리게 투덜대시는 것은 많이 봤다.

'엄마는 1948년에 이북에서 태어나셔서(Made in N.P.K.R) 피난길에 강원도 조금 사시다 대전에서 줄 곧 자라셔서 경상도 출신 남자랑 잘 맞지 않는 건가..' 하고 생각했었다.


일흔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는 지금도 말씀이 없으시다.

지금은 가끔 우리 엄마를 놀리는 재미를 살짝 느끼신 것 같은데, 그나마도 얼마 없다.

대부분은 '서부영화' 보시거나 '그냥' 계신다.

얼마 전 아버지 생신 때에도 생일 케이크에 꽂힌 어마 무시하게 많은 초를 부실 때 살짝 미소 지은 거 말고는 내내 '그냥' 계셨다.


시간이 흘러, 내가 어릴 적 아버지를 '관찰'할 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아니, 지금의 나는 그보다 좀 더 나이가 많아졌다.


이젠, 나도 가끔 '그냥' 있다.


'아무것도 아닌 날들'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찌어찌 그리 된다.

본래 밝은 성격인 나는 대체로 이것저것 농을 치거나 주변 사람에게 관심을 표하며 많은 시간 보내고, 특히나 아내에게 장난치는 낙으로 살지만.. (최근에는 아내에게 '침샘미인'이라 놀려 요즘 아내가 밥도 덜 먹고 뛴다) 혼자 있을 때면 '그저 그런 상태'로 '그냥'있는다.


어려서는, 또 20 ~ 30대에는 '그저 그런 생태'를 참지 못했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거나, 인생이 재미없어지는 것 같아 참지 못했다.

'기쁨', '슬픔', '분노', '환희', '즐거움' 등 어느 카테고리가 되었든 우리가 '알고 있는' 감정의 상태가 아닌 어느 불특정 상태에 놓이는 것을 피했다.


이제.. 전구가 쨍하고 켜지 듯 무언가 알 것 같다. 그 '불특정'한 감정 상태에 대해서.

무표정으로, '그저 그런 상태'로 '그냥' 있는 것이 아무 생각 없이, 그리고 아무 느낌 없이 생을 흘려보내고 있는 시간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딱히 우울하다거나 슬프거나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있음'에 평안함을 느끼고 있을 뿐.


마흔 넘어 새로운 감정을 발견했다.


'그저 그런 상태에 그냥 있음'이라는 감정, 또는 그러그러한 상태.


아무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고 있고, 때론 피부를 스쳐가는 바람도 느끼고 햇살이며 풀내음도 느끼고 있는 상태다. 그저 머리로 알고 있는 '감정의 카테고리들'에서 벗어나 있을 뿐.

어쩌면 '그냥' 있는 이 시간이 내 주변을 오롯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생의 경험이라 느낄 때도 있다.


생각해 보니, 그 감정의 카테고리라는 것들도 결국 누군가에게 배우거나 읽거나 해서 알게 된 것일 게다.

우리, 가끔 세상이 정의해 놓은 감정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멍~'하게 있어 보기로 하자. 해보니 평안하고 좋더라.


'그냥' 한번 있어 보자.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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