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두 남자의 수상한 가족사
심봉사와 토비트. 개안 설화의 미스터리 추적기
1. 추적의 변
"텍스트의 세계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현실 세계는 아니지만 현실을 닮은 세계, 있음 직한 세계다. 해석이란 이야기 속 어떤 상징이나 증후의 가치, 그러한 흔적들을 이야기된 이야기에서 이야기되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종의 고고학적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해석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하며 그것이 독자에게 바로 치료과정이 된다."
- 폴 르쾨르, 해석의 에움길에서
꽤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은 두 남자가 있다. 혹 중년의 로맨스나 가슴을 설레게 할 매력적 풍모를 지닌 인물에 관한 서사를 기대한다면 미리 실망하는 편이 낫다. 요즘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면 케케묵고 고리타분한 옛 남자들로 분명 관심을 끌기엔 최악의 선택일 테니까. 사실 이들이 나를 사로잡은 건 이성적 매력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들과 이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수상하게 여겨져서라고 해두자. 미스터리를 풀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고 할까. 물론 이것이 내 추동의 전부는 아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내 문제들과 대응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가지 못했을 테니까.
뻔하고 시시한, 나와 아주 거리가 먼 것으로 치부해 오던 옛이야기가 불현듯, 낯설고 새롭게, 마치 내 이야기인 듯 선명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었다. 우연히 다시 읽은 심청전이 그랬다. 대체 그동안 난 무얼 읽은 거지? 작품의 표피만 보고 심청의 효행에 대해 갑론을박하며 시효 지난 구닥다리 교훈이나 던져주는, 지난 시대의 낡은 몽상쯤으로 치부해 온 내게 심청전의 진짜 주인공은 심봉사였고, 심봉사가 눈을 떠 가듯 눈을 떠가야 하는 존재였다. 이들이 겪는 우여곡절 속엔 내 삶의 정황을 비추는 거울이 있었다. 뒤늦게 성경을 읽게 된 계기도 바로 그것이었다.
내게 성경은 서양 문학의 모태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신’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감정이 교차하는 모순의 책이었다. 호기심으로 시도해 보았다가도 몇 줄 못 읽고 덮게 되는,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그런 책이었다. 그러나 옛이야기를 온전히 읽으려면 그들이 살아온 시간의 켜만큼 나 역시도 거쳐야 할 경험의 나이테가 필요했던 모양일까. 중년의 심리적 우울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거기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온 다양한 인간 군상의 심층이 보였다. 그동안엔 신의 개념에 대한 고정관념과 부정적 편견이 읽기를 방해했다면 이젠 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의 마음, 그들이 이해한 신의 다양한 얼굴이 친숙하고 편안하게 다가왔다. 이후 겪은 만큼 이해되고 이해되지 못한 건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해하게 될 거라 여기며 읽던 중, ‘토비트’를 접했다. (토비트는 신구약 중간기 작품으로 개신교 성경에는 외경으로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가톨릭과 성공회 성경에 실려있다.)
토비트를 읽는 순간 내게 그는 고대 근동 지방에 살던 또 하나의 심봉사로 여겨졌다. 콩쥐와 신데렐라가 일란성이라면 이들은 이란성쌍둥이랄까. 둘은 기질도 성향도 아주 다르지만 이들이 겪는 불행엔 묘하게 닮은 지점이 있다. 한동안 이 수상한 두 남자와 이들을 둘러싼 사건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 찾기 놀이에 푹 빠졌다. 이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들의 인과가 남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 해두자, 그들과 나 사이엔 대화가 좀 필요했다고. 오랜 시간 내가 풀어 온, 그리고 앞으로 더 풀어 가야 할 숙제가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