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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Oct 08. 2024

선한 이들에게 찾아온 비극

권선징악, 인과응보 맞아?

3.

      

심학규는 양반의 후예로 행실이 청렴하고 지조가 있어 세속에 휩쓸리지 아니하니 사람마다 군자라 칭하더라.“(심청전) 

    

나 토비트는 평생토록 진리와 정의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나와 함께 귀양살이를 간 형제들과 동포들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 중략-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나로 하여금 살만에셀 왕의 총애로 귀여움을 받게 해 주셨다.” (1:12-13)

(:21)  

   

 심봉사와 토비트. 이들은 자타 공인 선한 남자로 등장한다. 심봉사는 유교적 가르침을 따라 산, 가난하지만 선한 인품의 선비였고, 그의 아내 또한 삯바느질로 가정의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지극 정성으로 남편을 봉양하는 이상적 여인상이었다. 심지어 마을 사람들까지도 모두 어질고 선한 이웃으로 심청을 자신의 딸처럼 돌본 듯 그려진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도화동(복숭아꽃 피는 마을)’일까. 자연스레 ‘무릉도원’이 연상된다. 그런데 왜 이토록 아름답고 이상적인 공간에서 심학규는 하필 책을 읽다 눈이 멀고, 그의 아내 곽씨는 아이를 낳다 죽었으며, 그의 딸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만 하는 비극이 연이어 발생한 것일까.      

 고대 근동지방의 북이스라엘인 토비트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우상을 숭배한 자신의 조상들과 달리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기도하고, 모세 율법을 엄격히 지켰으며 고아와 과부 등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일에도 적극적인, 모범적 인물의 표본으로 등장한다. 북이스라엘이 망한 후 그는 아시리아 제국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마음을 다해 야훼 하느님을 섬겼기 때문에 하늘의 복을 주어 벼슬자리를 얻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뜻밖의 시련이 찾아온다. 선지자의 가르침 대로 불행하게 죽은 동포들의 시체를 매장해 주려다가 어이없게도 참새똥에 맞아 시력을 잃고 만 것이다. 두 남자가 실명한 인이 서책과 참새똥이라니 참 황당하지 않은가. 선하게 살려다 도리어 재난을 만난, 이 두 남자와 이들의 집안에서 벌어진 연이은 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간 정신은 주변에서 일어난 어떤 사소한 일도 인과관계로 엮인 이야기로 표현하려 애쓴다. 환상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야기 자체는 논리적이어야 한다. 불확실성과 우연의 일치에 반감을 보이는 인간정신엔 인지부조화를 줄이려는 강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해석을 도출하지 못하면 지어서라도 인간은 해석을 확보하려는 존재다. 거기 인간의 생존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 인류학자 파스칼 부아예     


 대개 옛이야기에 대한 교과서식 답안은 권선징악, 인과응보, 고진감래로 귀결된다. 모두 결국 시력을 회복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으니 얼핏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서둘러 결과론을 미리 대입하지 말자. 나의 의문은 도입부의 불행이다. 권선징악 인과응보가 필연의 법칙이라면 이들의 불행에도 타당한 원인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만은 논리적 모순이 없어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원인을 묻자니 가혹한 느낌이 든다. 행운과 불행이 모두 필연적 인과라면 이들보다 무수히 많은 죄를 짓고도 떵떵거리며 잘 사는 이들의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권선징악이 맞다면 그들의 행운 또한 남모르게 쌓은 선업의 결과일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 아닌가. 그럼에도 일이 잘 풀릴 땐 나 역시 토비트처럼 나의 행운은 착하게 살아 하늘로부터 받은 복인 듯만 싶어 진다. 미워하는 타인의 불행은 잘못 살아온 탓에 받은 하늘의 심판이자 업보라고 그럴듯한 인과를 그리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게 되고 말이다. 순식간에 권선징악은 객관적 현실에 비춰봐도 충분히 타당한 법칙인 것만 같아진다. 그러나 다시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마주하면 곧바로 이 믿음체계는 산산이 부서지고 인과를 부정하게 되는 수많은 근거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나의 이성은 오직 이럴 때만 작동하는 것 같다.-

 사실 빛이 선인과 악인을 골라 해를 비추던가. 불행이 선과 악을 가려 오던가. 선한 인물들이 고초를 겪고 악이 날로 성장하고 번성하는 경우를 우리는 늘 만나고 있지 않은가. 객관적 현실은 그렇지 않은가. 따져 묻게 된다. 그러니 권선징악 인과응보란 애당초 ‘모든’이 아닌 ‘어떤’ 경우에만 통용되는, 논리적 모순을 지닌 불완전한 법칙임을, 객관적 근거를 댈 수 없는 무의식적 믿음의 영역임을 정확히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종종 하늘의 뜻을 제멋대로 짐작하며 내로남불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나의 탁월한 본능 앞에 스스로도 혀를 내두르게 되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모순투성이로 보이는 이 법칙이 오랜 세월 우리의 뇌를 지배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저 오랜 세월 길들여져 온 무의식적 버릇일까. 아니면 아직 다 모르는 우주적 인과를, 현상 너머의 이면을 인간은 선험적으로 느껴왔기 때문일까. 도대체 우리의 뇌는 왜 이토록 끈질기게 오래된 이 믿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 믿음은 정말 각자의 생존에 더 유리한 것일까.


종종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법칙이 불행을 겪는 이웃에게 이중의 폭력이 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타인의 질병이나 불행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불운 그 자체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며 신체에 가해진 해석과 문학적 은유에 반대한 수잔 손택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굳이 장황하게 오래된 믿음 체계에 제동을 걸어본 까닭도 이야기의 인과를 추적하는 과정이 수잔손택의 말처럼 혹 비슷한 고통을 겪는 이웃에게 어떤 편견을 불러일으키진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해석은 ‘모든’이 아닌 ‘어떤’ 경우로, 오직 이야기의 전체 맥락 안에서 추적해 본 지극히 주관적인 독법임을 전제한다. 옛 서사구조 자체가 오래된 믿음 체계로 이루어져 있고,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한 법칙이 아닌 각자의 주관대로 희망 회로를 돌리는 무의식적 믿음의 영역일 수 있음을 전제한다.

 다만 사건 자체는 우연일지라도 인간은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에 내적 필연을 그려가며 삶을 재창조하는 존재라 여긴다. 우주도 신의 뜻도 다 이해할 수 없고 정의 내릴 수 없는 복합적 상호작용들의 총체일 것이나 인간은 자신 앞에 펼쳐진 우연을 필연적 인과로 그려가며 자신의 서사를 만들어 온 것만은 오래된 진실이니까.  설화 구조의 논리적 인과를 따져가며 일관성을 추적해 가는 까닭도 여기 있다. 파스칼 부아예의 말처럼 인지부조화를 견디지 못한 내 강박의 소산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자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여정이 된다면 그 자체로 그것은 가치가 있다고.

 일관성을 얻고자 하는 내 강박은 다시 묻게 된다. 선한 이들에게 왜 비극이 찾아온 것일까. 일단 교과적인 답안인 인과법칙을 일단 믿어보기로 한 나는 도입부의 불행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란 가정하에 그 원인을 역주척해볼 것이다.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분법적 도식을 뛰어넘는 어떤 진실이 이야기의 심층에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믿은 선한 행위가 내일은 악업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듯 옛이야기 역시도 이와 같은 현실을 반영하는 역설과 변증법적 결론을 도출해 내기 위한 장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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