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를 위한 의례에 집착하는 두 남자.
4. 두 남자가 눈이 멀게 된 사연을 추적하라
나는 타인의 흠을 잡는 일에 능하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크거나 다수가 추종하는 인물에 대해선 유독 그렇다. 샅샅이 뒤져 기어코 흠을 찾고야 말겠다는 충동이 인다. 오를 수 없다면 끌어내려서라도 만인은 평등하다는 보편 법칙을 증명하고 싶은 건 그렇게라도 내 낮은 자존감을 지켜내고 싶은 것일까 그러나 이것을 나는 기울어진 평판을 바로 세워 우주적 균형추를 세우고자 하는 자연적 본능의 발로라 여긴다. 이제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해 옛이야기 속 영웅이나 군자, 혹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별종, 이런 인물들이 따로 있다고 동의할 수도, 동의하고 싶지도 않은 나는, 맘껏 삐딱해져 보리라.
죽은 자를 위한 의례에 집착하는 두 남자.
두 남자가 장님이 된 직접적 원인은 다르지만 두 남자에겐 수상한 공통점이 하나 발견된다. 선인들의 가르침을 중시하고, 죽은 자를 위한 의례에 유독 집착했다는 점이다. 심봉사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토비트는 죽은 자의 시체를 매장해 주는 일에 유독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심봉사는 글을 읽다 눈이 멀고, 고대 근동의 이스라엘인 토비트는 선지자 아모스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려고 죽은 동포의 시체를 매장하다 눈이 먼다. 왜 옛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데 그것이 도리어 불행을 낳고 만 것일까.
a. 심봉사 편- 조상 제사가 뭐길래?
그는 젊은 시절부터 눈이 멀어 몹시 궁핍한 처지의 양반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곤궁한 가계를 책임지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내조하는, 유교 덕목이 제시한 이상적 여성상의 아내 곽 씨 부인이 있다. 그런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했던 모양일까. 하루는 그가 아내를 불러 이른다.
“여보 마누라, 사람이 세상에 생겨날 제 부부야 뉘 없으리마는 전생에 무슨 은혜로 이 세상의 부부 되어 앞 못 보는 나를 일시 반 때도 놀지 않고 주야로 벌어서 어린아이 받들 듯 행여 배고플까 행여 추워할까 의복, 음식, 때맞추어 극진히 공양하니 나는 편하다 하려니와 마누라의 고생하는 일이 도리어 불편하니, 이젠 날 공경하는 일 그만하고 사는 대로 삽시다.”
좀 덜 먹고 덜 쓰면 되니 너무 애쓰지 말고 안분지족 하며 쉬엄쉬엄 살아가자는 심봉사의 마음이 십분 이해된다. 무능력의 비애랄까. 고생을 자처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으리라. 민폐는 되고 싶지 않은 마음. 동병상련의 측은지심이 인다. 그런데 심봉사 뒤이어하는 말이 수상하다.
“그러나 마음에 맺힌 일이 하나 있소. 나이 사십이나 슬하에 혈육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조상의 제사를 끊게 되면 죽어 지하에 간들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대할 것이며 우리 죽은 후에 초상과 장례, 소대상이며 해마다 돌아오는 기제사( 기타 등등 열거 생략 )는 누가 있어 밥 한 그릇 물 한 모금이라도 갖다 받들겠소. 눈먼 자식일망정 남녀 간에 낳아본다면 평생 한을 풀 듯하니 명산대천에 치성이나 그려보오 “
항상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반전의 접속어가 ‘그러나’다. 기껏 함께 편히 지내자더니 조상에 대한 제의(祭儀) 운운하며 제사를 나열한다. 남편 봉양만으로도 벅찰 텐데 없는 형편에 저렇게 많은 제사를 지내야 했단 말인가. 잠시도 편히 쉴 수 없는 처지였으리라. 안분지족 하자는 그의 말이 이젠 제 분수와 한계를 정확히 셈할 줄 모르는 공허한 수사로 들린다. 게다가 아내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자신을 보필하기도 벅찬 아내에게 자식 낳아달라고 명산대천에 치성을 드려보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나올 수 있을까.
생명을 낳아 기르고자 하는 욕망이야 건강한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오순도순 화목하게 생의 기쁨을 누리며 살고자 하는 소망이야 당연한 권리다. 그런데 하필 왜 자식을 바라는 마음은 자신의 사후 제삿밥 걱정으로 귀결될까. ( 이 대목에서 애국 운운하며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으려는 요즘 젊은이들을 무조건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인사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존재해야 하는지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존재해야 하는지 예수를 재소환해 묻고 싶어 지니 말이다.)
그는 조상에 면목 없는 줄은 알면서 눈먼 지아비 돌보느라, 죽은 조상 제사까지 책임지며 불철주야로 애쓰는 아내에게 면목 없는 요구인 줄은 왜 모를까. 왜 아내가 치성을 드려야 하는가. 결국 자식 못 낳은 죄는 내 죄가 아니라 아내의 죄라고, 칠거지악의 하나를 상기시키며 아내에게 교묘히 책임을 떠넘기는 꼴 아닌가. 심봉사의 무의식이 무심결에 드러난 것 아닐까. 당대의 관습이니 당연할까. 공자가 말한 인의 본질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선비라면 좀 달라야 하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심봉사를 단지 육체적 장애가 아닌 마음이 눈먼 자라 의심하기 시작한 첫대목이다. 유교적 가치를 숭상한다지만 그가 진정으로 유학의 참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 인간인지, 그저 외식하는 족속인지 두고 보자.
b. 토비트 편. 죽은 동포를 위한 시체매장
책만 보는 무능력한 가장 심봉사와 달리 토비트는 가정경제뿐 아니라 이웃과 동포를 위해서도 자선을 아끼지 않는 시체말로 핵인싸급 위풍당당한 인물이다. 그는 선지자 아모스의 가르침을 따라 죽은 이스라엘 동포들의 시체를 매장해 주다 아시리아에 재산을 몰수당하는 고통을 겪고 이 일로 귀양을 떠나지만 높은 지위에 오른 사촌 덕분에 다행히 무사귀환하여 수월하게 업무에 복귀한다. 그는 자신이 한 선한 일에 대한 답으로 하느님이 내리신 복이라 믿으며 이후 더욱 열심히 죽은 동포를 위해 시체를 매장해 주는 일을 올곧게 실천한다. 지나친 자부심이 좀 거슬리지만 충분히 반듯한 인물로 살려고 노력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오순절을 맞아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을 불러 함께 먹인 후, 그는 죽은 동포의 시체가 거리에 널브러져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해가 지길 기다려 동포의 시체를 매장한다.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찬사가 쏟아져 나올 법한 일이다. 그런데 그곳에도 나와 같이 고약한 심보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일까. 그가 마주한 현실은 정 반대였다. 그는 시체매장을 돕다가 담 너머로 이웃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소리를 듣게 된다.
“지난번에도 이런 일로 사형당할 뻔하고서도 또 이런 짓을 하다니 겁이고 뭐고 다 없어진 모양이지.”
그날 밤, 그는 담 위에 있던 참새들이 떨어뜨린 뜨거운 똥에 맞아 시력을 잃고 만다. 이후 그는 용한 의사를 백방으로 찾아다녀 보았지만, 낳을 수 없어 눈이 먼 채로 사 년을 암흑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하필 왜 생뚱맞게 ‘참새똥’에 맞아 눈이 멀게 된 것일까. ‘참새똥’이라니! 이 재앙은. 인간이 조심해서 피할 수 있는 성질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이웃들의 비웃음 소리와 참새 똥에 맞아 눈이 먼 사건 사이엔 도대체 어떤 인과가 있을까. 참새처럼 조잘거리는 사람들의 입방아로 곤혹스러워졌음을 상징하는 걸까.
옛 설화에서 새는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상징적 매개체로도 알려져 왔다. 흥부에게 제비가 박을 물어다주듯 서양 설화에서는 비둘기나 참새는 하늘의 뜻을 전하는 정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면 참새똥은 하늘로부터 온 재앙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는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논리적 인과를 거스른다. 도대체 왜 칭송받을만한 일을 하고도 제비가 박 씨를 물고 오는 행운이 아닌, 도리어 ‘참새똥’에 맞아 눈이 먼 참변을 당한 것일까. 선한 일이 한 것이 도리어 이웃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심지어 눈까지 멀게 된 이 상황을 그는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 그는 이제 어떤 답을 찾아가야 할까?
눈이 멀게 된 토비트로 인해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은 이제 여자의 몫이 된다. 아내 한나는 시력을 잃은 남편이 일을 못하게 되자 일감을 찾아 집안의 가장 역할을 자처한다. 이제 남편을 돌보는 건 아내 차례라고 단단히 마음먹은 듯 보인다. 평소 실천력도 뛰어난 토비트니 심봉사와는 결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아내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한 구절 등장한다. 하루는 일을 마치고 늦게 돌아온 아내 한나가 주인에게 품삯과 함께 새끼염소도 덤으로 얻어 왔다고 자랑한다. 그러자 토비트가 말한다.
“이 새끼염소는 어디서 난 것이오. 혹시 훔친 것은 아니오? 어서 주인에게 돌려주시오,”
아내가 한 일에 비해 지나치게 과분한 답례라 여겨졌던 모양일까. 아내 한나가 정황을 설명해도 토비트는 아내를 의심하며 어서 주인에게 새끼염소를 돌려주라고 재촉하며 아내를 나무란다. 어려운 형편에도 올곧게 살려는 그의 태도를 칭송해야 할까. 정황을 설명했음에도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결벽증 환자 같은 그의 태도가 어쩐지 거슬린다. 설령 아내가 혹 잘못했다 할지라도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아내의 마음을 먼저 헤아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죽은 자를 위해서도 울던 그 아닌가. 죽은 이를 돌보는 마음과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려던 태도를 비난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런데 왜 그 마음이 아내에겐 인색할까 율법을 지키고 조상에 예를 다하고 이웃 동포를 위하는 만큼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는 공감 능력이 그들에게 있었을까, 어쩐지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배경엔 그의 내면에 어떤 결핍의 요소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판단은 이르다. 따라서 좀 더 펼쳐지는 서사를 지켜보기로 한다. 사사의 맥락이 나의 의심이 아니 땐 굴뚝의 연기인지 땐 굴뚝의 연기인지를 확인시켜 줄 것이다. 이들의 부부관계를 좀 더 깊이 추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