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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Oct 18. 2024

두 남자의 부부관계를 추적하라 2   

2) 토비트의 아내 안나 편.

  토비트의 아내 안나 편.    

  

 그렇다면 토비트의 아내 안나는 주인에게 새끼염소를 돌려주라는 남편의 의심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녀도 곽씨부인과 비슷하게 대응할까. 뜻밖에도 사뭇 다른 답변이다. 오히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되묻는다.


 “당신이 베푼 자선으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쌓은 덕행으로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지금 이 꼴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토 2장 14절).   

   

직설이다. 안나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아마도 옳은 소리만 하는 남편에게 참다못해 폭발한 것 같다. 지극히 평범한 그녀의 항변에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통쾌해진다. 분명 바른 남편이다. 그러나 잘난 남편의 올곧은 믿음과 선의의 결과는 귀양살이로도 모자라 눈까지 멀고, 가족 모두가 고통을 겪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하느님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으리라. 남편을 믿고 따랐건만 그의 믿음이 왜 이런 불행을 낳는지, 게다가 갑작스럽게 곤궁해진 가계를 책임지느라 애쓰는 자신의 고통은 모른 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자신의 행실만을 의심하는 남편 태도에 화병이 날 만하다. 곁에 있는 아내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채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며 그토록 슬퍼하는 토비트의 연민과 약자를 배려하고 자선을 베푸는 그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설령 옳은 지적이라 해도 상대의 마음과 정황을 헤아리는 것이 먼저 아닌가. 아내의 답변 이후 바로 이어지는 토비트의 기도 장면이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지 않았고, 주님 안에서 참되게 살지 못했습니다. 죄인에게 내리시는 주님의 심판은 모두 참되십니다. - 중략- 그러나 나에게는 당치 않은 조롱이 들려오고 많은 슬픔이 나를 짓누르고 있으니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차라리 주님, 이 고뇌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 주시고 영원한 곳으로 나를 보내주소서.”(: 3)       

   

  그는 갑자기 자신이 참되게 살지 못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평생을 올바르게만 살아왔다고 자부하던 그가 왜 자신이 죄인이라 고백한 것일까? 아내의 잘못도 자신의 책임이요.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아내의 잘못된 마음도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일까. 앞서 자신도 그동안 아내처럼 선한 일을 해서 복을 주셨다고 믿어온 사람 아닌가. 그렇다면 혹 아내의 말을 통해 내면에 품고 있던 자신의 감정을 보게라도 된 것일까. 심중에 품은 의심을 아내를 통해 확인하고 자신도 그들과 같은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어 그는 주님께는 죄인이나 자신을 향한 세상의 조롱은 당치 않으니 이런 세상에서 사느니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고백한다. 이는 하느님이 주신 생명과 그가 하시는 일을 이제는 온전히 믿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증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고백은 역설이다.    

  

 성경엔 이와 비슷한 정황이 욥기에 있다. 두 작품은 모두 신구약 중간기에 쓰인 작품으로 표현 방식은 달라도 ‘선한 이들의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민족이 처한 현실, 신실하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했다고 믿었으나 수난사를 겪어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동시에 그들의 의식이 어떻게 전환해 가는지를 엿볼 수 있는 주요 작품으로 토비트의 내적 고민은 구체화된 욥의 고백을 통해 더 잘 엿볼 수 있으므로 같이 보자.)

  토비트가 스스로 선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다면 욥의 경우는 하느님마저도 그의 선함을 의심할 수 없다며 칭찬했던 인물이니 단연 한 수 위다. 그러나 그런 그도 가산은 물론이고 병고로 가족들을 잃었을 뿐 아니라 온몸에 종기가 퍼지는 몹쓸 병까지 앓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욥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옳다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주신 것도 하나님이니 거두신 것도 그라는 것이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아내가 말한다.      


 당신은 이 지경인데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차라리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라.” (2: 9)

 

 아내의 대사가 놀랍지 않은가. 안나와도 비교 불가의 수위 센 발언이다. 과연 욥과 대극을 이루는 욥의 아내다운 언사다. 성경 속에서 이런 숨은 구절을 발견할 때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도덕 교과서 같은 설교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스레 흘러넘치는 솔직한 감정을 엿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토비트와 같이 아내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나무란다. ‘하느님께 복도 받았으니 화도 받지 않겠느냐’.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도덕 교과서 같은 그 말은 어쩐지 자연스러운 감정과는 괴리된 듯 보인다. 욥과 같은 인간은 근본이 다를까. 다행히 그도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입증하는 반전이 시작된다. ( 성경을 좋아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갑자기 그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그의 항변이 구절구절 절절한 외침이다. 아내의 말 한마디에 그도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일까.


“나는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시오.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7:18 )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내 영혼이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어찌하여 주께선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의인의 피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니이까.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10:1,3)

“땅은 어두워져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10:22)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심경 고백이 이어진다. (나는 어떤 문학 작품 속에서도 이에 버금가는 구절들을 발견키 어려웠다. 삶이 괴로워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 있었다면 욥기 전문을 권한다.) 하느님께 묻고 따지고 부정하는 항변이 이제 보니 아내를 능가한다. 왜 아내의 답변 후 이런 고백들이 갑자기 펼쳐지는 것일까. 아내의 말이 미처 의식 못한, 이들이 억압해 온 감정을 훤히 비추는 거울로 작동한 게 아닐까. 두 남자가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모범적 인물로 자신의 페르소나에 치중해 살아왔다면 두 아내는 이들의 내면에 숨은 자의식의 그림자를 수면 위로 드러나게 역할을 한 셈이라고. 그러니 누가 옳고 그르다 할 수 있을까. 두 아내 덕분에 이들은 올바르게 살아온 자신에게 시련을 준 하느님에 대한 의문과 분노의 감정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확인하고, 시련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혼돈 속에 놓이게 된 심경을 솔직히 토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으니 하느님과 진정한 내적 대화를 시작하게 된 것 아닌가. 이후 욥은 하느님과의 오랜 입씨름을 거친 후 비로소 응답을 듣고, 이렇게 고백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이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말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주를 눈으로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하나이다.(욥기 42: 16)      


 토비트와 욥. 그들은 시련 속에서 그동안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여겼던 모든 것이 자신의 오만이었음을 깨닫고 ‘모름’을 자백한다. 소크라테스도 고백한 ‘무지의 지’다. 그동안 자신의 의식이 객관적 진리라 믿어 온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하기 시작한다. 부정과 해체의 시간이다. 성장한 나무가 열매를 맺고 한계에 이르면 잎을 떨어뜨린 후, 겨울을 보내는 이치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나면 새싹이 움트고 봄이 찾아온다. 그것이 자연의 신비다. 이렇듯 과거의 자아가 죽지 않으면 새로운 자아의 탄생은 없다. 낡은 의식에 집착한 자아가 시련 속에서 한계를 깨닫고 자기 비움을 통해 내면으로 침잠하여 마음을 정화한 후 천지와의 감응을 통해 참 자아로 거듭나는 과정. 이것이 인생의 신비다. 융은 종교적으로는 이 여정이 하느님, 또는 신성 체험의 순간으로 그려진다고 보았다. 거듭남이자 부활의 의미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를 심리적 관점에서 보면 무의식의 자기와 접촉하게 된 순간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신성 체험도 이와 같이 시련 끝에 만난 자기 비움의 내적 체험으로부터 발아된 의식변환 여정으로도 볼 수도 있으리라. 죽기를 간청한 토비트의 기도는 하느님에게 전달되었고 비로소 하느님이 그에게 응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응답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기도 후의 변화를 통해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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