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응답한 기도의 비밀을 추적하라
- 토비트와 욥의 회개
* 지난 글이 발목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버릇처럼 삼천포인지 심천포인지 늪에 빠져든 느낌이다.
하느님이 응답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 아니 거꾸로 물어보자. 인간은 언제 하느님이 응답을 주셨다고 여길까. 믿는 자들은 체험이 있으니 믿을 것이고, 믿지 않는 자들에겐 그것이 죄다 귀신 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사실 성경에서조차도 하느님의 뜻이라 믿고 행했어도 후에 보면 그것이 자신의 환영일 뿐이었을 깨닫게 되는 일이 허다하니 말이다. 사실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왕위에 오르고 그의 뜻에 따라 천하를 통치한 최고의 지혜자로 알려진 솔로몬도 훗날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며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 라며 자신의 모름을 자백하지 않았던가. 지혜자나 우매자나 당하는 일을 모두 매 한 가지라고 말이다. 토비트나 욥의 경우도 그렇다. 자신들은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믿으며 살았지만 후에 자신들이 ‘모름’을 고백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제야 그들의 기도가 하느님께 전달되고 하느님이 그들의 기도에 응답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쉽게 발설하는 자일수록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모르는 자일 확률이 높다. 성경의 맥락이 이를 증거 한다. - 그러니까 하늘의 뜻을 안다. 척 보면 안다. 해봐서 안다. 모든 안다는 소리를 함부로 지껄이는 자일수록 수렁에 빠질 확률이 그만큼 높다. 경계하자. 찔린다.-
(3장 기도문 참조) 토비트의 기도는 단순하다. 처음엔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 채 무조건 나를 기억해 달라고 살려달라고 주님께 호소한다. 혹 죄를 지었더라도 자신과 조상들이 무지해서 그런 거니 봐 달라고도 한다. - 공짜 심보 아닌가. 죄를 모르면 죄를 알게 해달라고 빌어야 옳지 않을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변할 가능성도 있을 테니 말이다. - 다행히 그는 이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의 심판이 옳음도 인정한다. 그리고 죽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당최 어떤 죄를 인정했는지를 알 길은 없다. 기도 후 그의 달라진 태도와 유언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하느님께 죽기를 간청한 기도를 올린 후, 먼저 자신 없이 살아가야 할 가족의 삶을 걱정하며 아들에게 자신의 친구 가비엘에게 빌려준 돈을 찾아오도록 지시한다. 가족의 생계유지에 꼭 필요한 기초 자금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다. 이어 그는 아들이 지켜야 할 첫 계명으로 “어머니를 절대 슬프게 하지 말 것, 어머니를 소홀히 대하지 말고 평생토록 존경하며 그 마음에 드는 일만 해 드리라”라고 당부한다. 율법을 엄격히 지키고 자선과 사회적 책무만을 강조하며 아내를 나무라던 그가 이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그동안 자신이 아내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일까.
이외에도 눈에 띄게 달라진 대목들이 있다. 여전히 자선을 행하라고 하지만 “네 재산 정도에 맞게 힘닿는 데까지 행하라”라고 한다거나 “필요 이상의 물건이 있거든 그것으로 남을 구제하고 남을 구제할 때는 아까운 마음을 품지 말라”라고 한다. 선행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음을,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베풀고 베푼 후엔 그 사실을 잊으라는 당부다. ‘함이 없는 함’을 역설한 노자의 무위의 도와도 금욕적 고행을 실천하던 부처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은 중도의 지혜와도 통하는 대목이다.
이어 그는 무엇보다 교만을 경고한다. “교만은 파멸과 혼란을 가져오니 늘 이를 경계하라.”고 당부한다. 그는 자신이 불운을 겪게 된 화근이 자신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긴 것일까. 선행을 베풀었는데 도리어 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고 가진 재산마저 다 잃게 된 경험을 하면서 미처 의식하지 못한 내면의 억울한 감정을 대면했으리라. 조롱거리가 되자 참을 수 없고 살 가치가 없다고 여긴 건 그만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는 반증일 테니 말이다. 자신의 선행이 결국 하느님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특별한 존재로 비치길 바라온 인정 욕구와 도덕적 우월감,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복 받은 자라는 선민의식, 자신의 행위는 그러한 자의식이었을 뿐 타인에 대한 진정한 공감과 사랑은 아니었음을. 그는 시련 속에서 자신도 자신이 하찮게 여긴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보잘것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고서야 비로소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정황이 담긴 욥의 내적 고백도 함께 보자. 욥의 경우는 그가 자신의 죄를 인식해 가는 과정이 토비트에 비해 구체적으로 서술된다. 두 남자의 기도는 모두 하느님께 전달되었고 하느님이 응답한 기도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를 통해 하늘로부터 받은 응답의 공통점을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아내의 비난을 들은 후 욥은 그녀의 어리석음을 나무랐지만 이후 그도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온 세 친구에게 처음으로 하느님에 대한 의문과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솔직히 토로한다. 그러나 친구들이 한결같이 옳은 소리로 그에게 충고하자 견딜 수 없이 휘몰아치는 분노를 느낀다.
먼저 친구들의 말이다.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네 경외함이 네 자랑 아니냐 네 소망이 온전한 길 아니냐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욥 4 - 5장)
대개 친구들의 결론은 비슷하다. 네 고통을 이해는 하지만 거기엔 나름의 원인이 있을 테니 불평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결국 욥의 불행은 업보의 결과라는 낙인으로 귀결되고 만다. 딱히 틀린 말은 없다. 그러나 참 밉상이다. 이 소리를 듣고 욥이 탄식한다.
“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넘기는구나.”(욥 6: 25-27)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비록 내게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겠느냐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만하며 내게 수치스러운 행위가 있다고 증언하려면 증언하려니와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싼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욥 19:2-6)
- 욥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금 내가 하는 짓이 바로 인과응보의 논리로 그가 불행하게 된 연유를 밝히는 과정이니 말이다. 옳은 소리 하는 친구와 다를 바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셈인 줄 알지만, 나의 추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런 고통 속에서 이들이 무엇을 깨닫고 있는지 몹시 궁금해서다. -
하느님의 법에 대해 의문이 드는 솔직한 감정을 토로할 뿐인데 불순종과 인과의 논리를 들먹이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욥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질병과 가난으로 인한 고통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세 친구의 모습은 공감 능력 부족한 인간들의 전형적인 염장질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그만큼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는 일이 어렵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들도 일주일 동안이나 그의 곁에 머물며 함께 슬퍼했던 인물들이었으니 말이다. 욥은 친구들이 옳은 소리를 늘어놓는 모습을 보면서 돌이켜 그것은 바로 과거 제 모습이었음을 깨달아 갔으리라. 하느님에 대해 솔직한 감정을 토로한 자기 아내에게 자신이 자신의 친구들처럼 옳은 소리만 하며 나무랐던 순간들을 거울처럼 환히 보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아내와 친구들은 그렇게 욥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자신이 믿고 있던 신념체계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왜,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꼬리의 꼬리를 물고 문제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 심적 고통이 그를 그 여정 위에 서게 한 것이다. 욥은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의 논리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에 의해 권선징악을 뒤집는 이와 반대되는 증거가 쭉 나열되지만 일단 생략한다. 그는 고통을 겪기 전엔 몰랐던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 다른 관점들에 눈을 뜬다. 자신의 작은 머리로는 다 헤아릴 수 없었던 권선징악적 판단 너머의 우주 전체의 역사를 아우르는 하느님의 형상. 이분법을 초월한 하느님의 우주적 자리를 인식한다. 그리고 자신은 여전히 하느님의 전체상을 온전히 알 수 없음을, 동시에 그동안 자신의 의를 근거로 마음속으로 끝없이 타인을 재단해 왔음을, 타인의 입장에서 느낄 줄 아는 공감 능력과 사랑이 결여된 인간이었음을, 그것이 곧 독선이자 교만임을 깨닫게 된다. 이제 보니 욥이 1장에서 자식들이 마음으로라도 범죄 할까 염려했다든지, 그는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다는 구절들은 오히려 그의 마음속 교만과 불안을 읽는 복선일 수 있겠다고 여겨진다.-
욥은 후에 모든 부조리에 대한 의문과 하늘의 뜻에 대한 저항과 분노를 솔직히 다 고백한 후에야 비로소 하늘의 음성을 듣고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를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하나이다. ”라고 고백한다. 티끌과 같은 미미한 존재라는 그의 자각은 고난의 긴 여정 끝에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체득한 그의 지혜였다.자기 내면의 부정적 감정을 정직하게 마주했기에 그는 자신의 전체상. 자신이 억압한 그림자로부터도 심리적 통찰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혹 당신이 교인이라면 순종 불순종으로 함부로 타인을 재단하지 않기를. 하느님은 그 세 친구를 가리켜 욥과 같이 옳지 못하다 하지 않았던가.)
역지사지, 그게 말처럼 쉬울까. 기껏 입장 바꿔 한 생각이라는 것도 대개 자기 인식 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테니 말이다. 부부끼리도 쉽지 않으니 평생 싸우면서 배우는 게 역지사지일까. 토비트가 곁에 있는 아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헤아리는 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했을까. 타인의 입장을 헤아린다는 것. 스며든다는 건 한계를 깨닫고 나를 지우는 체험 없이는 알 수 없는 자리이리라. 나와 너 사이, 없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마르틴 부버의 하느님의 상에 대한 역설적 비유가 나는 좋다. 두 남자가 시련 속에서 회개하며 깨달은 진정한 공감과 온전한 사랑은 그만큼 체득하기 어려운 과정일 터이니 이제 그만 입을 다물어야겠다. 오늘은 어쩐지 쓴 만큼 더 자꾸만 부끄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