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봉사 집안의 되풀이되는 비극.
수상한 부녀지간 1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무의식의 그림자를 통찰한다는 것은 인격 성숙 여정의 첫 발걸음을 떼는 일이다. 융-
토비트는 시련 속에서 자신의 죄를 인식했다. 심리 변화 여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죽기를 간청하는 기도를 올린 후 아들에게 남긴 유언을 통해 그의 심경변화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심봉사에게도 이와 같은 내적 변화를 엿볼 수 있을까. 심봉사의 말을 듣고 아내는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고 그 결과 심봉사는 원하던 자식은 얻었다. 그러나 원했던 자식은 아내의 목숨값이 되고 말았다. 어떤 심정일까. 남편 봉양하랴, 집안 살림하랴 그 많은 기제사 챙기느라 힘든 아내에게 자식까지 바란 자신의 욕심이 부른 화라고 자책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아내의 장례를 치르는 그의 모습이 어쩐지 기이하다. 자책은 고사하고 자신을 남겨두고 혼자 저승으로 가버린 마누라에 대한 야속함과 원망만이 가득하니 말이다.
“여보 마누라. 내가 죽고 마누라가 살아야 어린 자식 살려내지. 천하천지 몹쓸 마누라. 이 무정한 마누라. 그대 죽고 내가 살아 초칠일 못다 간 어린 자식 앞 못 보는 내가 어찌 키워낼고”
“서왕모를 따라갔나. 월궁항아 짝이 되어 도약하러 올라갔나. ”
장례를 치르던 날, 심봉사는 서럽게 운다. 앞 못 보는 자신이 어린 자식을 데리고 살아가야 할 막막한 심정을 토로한다. 아내보다 자신이 죽었어야 한다는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왜 아내가 몹쓸, 무정한 마누라인가. 심지어 그는 궁사 예가 서왕모에게 불사약을 청했더니 아내 항아가 이를 몰래 먹고 혼자 달로 도망가버렸다는 월궁항아의 고사를 예로 들어 곽씨부인이 항아처럼 자신만 남겨두고 혼자 몰래 더 좋은 곳으로 가버렸다고 원망한다. 서왕모라면 죽음과 파괴의 여신인 동시에 영원히 사는 불사약을 전해주는 존재로 부부가 한날한시에 꿈에서 만난 여신이다. 그렇다면 그도 궁사 예처럼 영원한 불사약을 바라는 심정으로 곽씨부인과 깉이 죽기를 바라왔다는 것일까. 측은해진다. 의무에 짓눌렸을 곽씨부인처럼 무능력한 심봉사에게도 이승은 그리 행복한 공간은 되지 못했던 가보다. 현실이 고달플 땐 환상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내세 천국이나 무릉도원 같은 무의식적 소망의 충족이 필요한 것인지도. 이런 심정이었다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을 그에게 쉬이 적용키 어려워 보인다.
그는 아이를 원했다. 조상 제사에 집착했고,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신을 위해 물 한그릇라도 떠놓고 빌어 줄 자손을 필요로 했다. 그것도 현세에선 복락을 누리지 못하지만 내세에서만은 복락을 얻고자 하는 무의식적 기대였을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러한 욕망조차 기제사를 도맡아 치러 온 아내에게 기생해 온 욕망이었을 뿐, 자신의 욕망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 본 적 있을까. 어쩌면 자신의 한계와 분수를 정확히 셈할 줄 몰랐던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힘든 일을 도맡아 처리해 준 아내가 있으니 자신은 군자처럼 좋은 소리, 옳은 소리만 하면 되었으리라. 아내는 자식 못 낳은 죗값마저 다 치르고 떠난 셈이니 당시 관습으로 이해해도 그리 남을 업보도 없다. 선녀가 잠시 지상에 내려와 죗값치르고 훨훨 떠났다는 옛이야기처럼 심봉사는 아내가 그렇게 자신만 홀로 남겨두고 영원히 사는 도원으로 떠나버린 것이라고 그렇게 여겼을 자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도 자신의 욕망에 대한 책임값을 잘 지불하고 떠나면 된다. 그렇게 마음먹으면 된다고. 그런데 그는 이를 온전히 깨닫고 있을까.
심봉사가 어찌나 구슬프게 울던지 온 마을이 함께 슬퍼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세한탄일 뿐 가장의 묵직한 책임감을 엿보기 어렵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나약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죽고 싶은 심정을 드러내고 있지만,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이 죽더라도 살아가야 할 가족의 밑천을 마련하고자 한 토비트와 달리 심봉사는 자기 시련의 원인에 대한 성찰이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그가 얼마나 아내에게 의지해온 인물인지만 확인하게 될 뿐이다. 인과응보의 논리를 적용하고 싶지 않지만 아내가 죽고 태어난 딸 심청마저도 결국 죽게 되는 이 집안의 되풀이되는 비극의 원인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단지 우연이기만 할까.
심봉사의 딱한 처지를 아는지라 마음 사람들은 십시일반 가진 것을 모아 장례를 치러준다. 곽씨부인을 대신해 동네 여인들이 심청을 젖을 먹여 길러내니 인정이 넘치는 마을이다. 심봉사 인정 많던 곽 씨 부인과 가련한 어린것을 불쌍히 여겨 도와 달라는 하소연도 수준급이다. 심봉사가 다른 재주는 없어도 인정에 기대어 동냥질하는 재주만큼은 탁월한 듯 보인다. 덕분에 심청은 젖동냥으로 무럭무럭 자란다. 어미 없이 자식 키우는 눈먼 홀아비의 심정에 연민이 일다가도 딸아이를 바라보며 조석으로 하는 그의 말에 덜컥 불편해지고 만다. 아니, 확 분노가 치민다.
“아가 아가 자느냐 아가 아가 웃느냐 어서 커서 모친같이 현철 하여 효행에 있어 아비에게 귀함을 보이거라 “
심청이 갓난아이 시절부터 매일 들어온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아비에게 매일 이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라. 심봉사는 아이가 빨리 자라 아내의 역할을 대신해 주길 바라고 있는 게 아닌가. 마누라 덕에 의지해 살더니 이젠 자식 덕 보려는 심보 아닌가. 심봉사가 아내의 고통을 헤아려 본 마음이 진실로 있었다면 과연 딸자식을 키우며 이런 소리를 쉽게 읊을 수 있을까. 이어 심봉사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인의와 효행을 다한 옛 모범사례들을 쭉 나열한다. 인의니 도리니 하는 모두 옳은 소리들이다. 덕분에 심청이 칠팔 세가 되자. 아비에게 하는 말이 걸작이다. 이젠 부모님의 은덕을 갚기 위해 자신이 나서서 밥을 빌어다가 조석을 챙겨드리겠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심봉사는 기특해하면서도 “인정은 그러하나 어린 자식이 동냥하면 내 마음이 편하겠냐. 그런 말 말라” 하고 사양한다. 그러나 이어 심청이 다시 하는 말이 걸작이다.
“자로는 현인으로 백리 길을 걸어 쌀을 구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제영은 어린 여자로되 낙영 옥중에 갇힌 아비를 구하려고 제 몸을 팔아 아비의 죄를 갚겠다 하였으니 사람이 고금이 다르리까. 고집하지 마소서”
그러자 심봉사는 이 말 듣고 옳게 여겨
“기특하다 내 딸이야! 효녀로다 내 딸이야! 네 말대로 그리 하여라 “라고 답한다.
이렇게 해서 심청은 칠팔 세부터 어머니의 대를 이어 가장 역할을 떠맡는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아비의 직접적인 강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를 하늘이 내린 심청의 고운 심성으로 보아야 할까. 심봉사의 놀라운 가스라이팅 실력으로 보아야 할까. 어미도 없이 자란 아이다. 한참 떼도 부리고 응석도 부려할 나이에 너무 일찍 철이 든 것만 같아 처량한 마음이 인다. 어서 빨리 자라길 바라 온 아비의 바람대로 아이는 일찍부터 지나치게 어른스럽다. 자라면서 배운 건 오직 유교의 법도에 관한 옛글이었을 테고, 어린 심청은 그것을 마땅한 도리로 여기며 자랐을 것이다. 그런 심청을 동네 사람들 모두 심성 바른 아이로 기특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자고 아버지가 가르친 옛글의 도리엔 아내 된 도리와 자식 된 도리만 있고 아비의 도리와 남편의 도리는 부재한 것일까. 그를 군자라 하지만 군자다운 면모를 도대체 확인하기 어려우니 말이다.
어린 딸 내보내고 내 맘이 편하겠냐는 말도 순 개뻥이지 싶다. 자기 합리화를 위한 밑밥 깔기 아닌가. 나는 절대 강요한 적 없다. 하지 말래도 극구 제가 나서서 그리했을 뿐. 심봉사 화법이 그렇다. 말은 상대를 위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상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일은 딱히 없다. 인정하고 칭찬하는 재주 하나로 아내 부리고 딸 부리고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그래도 군자라고 인정까지 받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재주 아닌가. 내 심보가 꼬인 탓일까. 심청은 자로처럼 아비를 위해 구걸을 시작했고, 훗날엔 제영처럼 눈먼 아비를 구하려고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게 되었으니 아비에게 배운 고금의 가르침이 이 집안의 되풀이되는 비극의 원인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