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에 빠진 심봉사1
수상한 스님 몽운과의 인연
심청이 자라 이 집 저 집 일 다니며 아버지를 봉양하던 어느 날이다. 해질 무렵인데도 심청이 돌아오지 앉자 심봉사는 가만히 기다리지 못하고 마중을 나간다. 왠지 허둥지둥 불안하다. - 그러다 하필 지팡이를 잘못짚어 개울에 빠지고 만다. 개울이다. 침착하게 일어서기만 하면 될 일인데 그는 놀라 허둥지둥하다 허리에 닿던 물이 목까지 차올라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된다. 불안이 상황을 악화시킨 꼴이다.
- 이 시각, 심청은 일하러 간 장승상 부인 댁에서 수양딸 삼고 싶다는 부인의 말을 듣는다. 그렇다면 심봉사의 불안은 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는 물에 빠져 하우적거리며 살려달라 소리친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몽운(夢雲)사 화주승이 소리를 듣고 달려온다. 그는 심봉사를 구하고 그간의 사연을 듣더니 안타까워 비책을 하나 일러준다.
”불쌍하오. 우리 절 부처님은 영검이 많으셔서 빌어 아니 되는 일이 없고, 구하면 응하나니 공양미 삼백석을 부처님께 올리옵고 지성으로 공경하면 정녕 눈을 떠서 완인이 되어 천지 만물을 보오리다”
그의 말씨는 친절하기 이를 데 없다. 물에 빠진 이를 구해준 이요. 절망에 빠진 이에게 간절히 구하면 개안할 것이라는 희망도 불어넣어 준 이다. 게다가 시주할 형편이 아님을 알고, 무리하지 말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결코 가난한 봉사에게 돈을 뜯어낼 요령으로 하는 말이 아닌 듯 말이다. 사기라면 고수의 경지다. 다만 탁 걸리는 구절이 있다. 그가 절을 증축하려고 권선문( 절에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액수를 적는 방명록)을 들고 마을로 내려오던 중이었다는 점이다. 왜 하필 부처님은 그 절에서만 유독 영험함을 발휘하실까. 게다가 공양미 삼백석을 바쳐야만 낫는다니! 권선문(勸善文)도 흥미롭다. 시주를 많이 하면 선한 것인가. 면죄부를 사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듯 무전유죄, 유전무죄 아닌가. 부처님 세상이나 하느님 세상이나 세상 돌아가는 풍경은 다를 바 없다면 굳이 聖과 속俗을 따로 구분할 필요 있을까. 어차피 안이나 밖이나 요지경 속이라면 말이다. 그래도 글 꽤나 읽은 선비인 심봉사니 이런 농간에 넘어갈까 싶지만 그는 덜컥 시주를 약속해 버리고 만다. 몽운은 미끼를 던졌고, 심봉사는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셈이다. 지팡이만 잘 짚고 서면 될 상황인데 허둥대다 미궁에 빠지고 만 꼴이다. 그는 왜 자꾸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심봉사 덜컥 삼백석을 내겠다고 하자 몽운사 화주승 허허 웃고,
“여보시오. 댁의 가세를 살펴보니 삼백석을 무슨 수로 하겠소? 무리 마시오.”
그러자 심봉사 홧김에 하는 말이
여보시오. 어느 쇠 아들놈이 부처님께 적어놓고 빈 말하겠소? 눈 뜨려다가 앉은뱅이 되게요? 사람 업신여기는 거요? 염려 말고 적으시오. “
그는 집에 돌아와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고 후회한다. 다행이다. 그런데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공포가 이어진다. 이젠 눈이 먼 게 문제가 아니라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앉은뱅이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압도한다. 눈을 뜨고자 했을 뿐인 희망 회로는 어느새 약속을 못 지키면 심판받을 것이라는 공포로 이어진다. 꼬리를 물고 뱅뱅 돈다. 갑자기 그는 왜 앉은뱅이를 떠올렸을까. 눈을 뜨지 못하면 앉은뱅이처럼 영원히 주저앉은 삶. 도약이 없는 삶. 그런 삶의 살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일까. (장님과 앉은뱅이 이야기에 관해선 따로 좀 더 깊게 다뤄 보기로 한다..)
마누라 대신 자신이 죽었어야 한다고 여겼던 심봉사다. 죽고 나면 제사상에 물 한 그릇 떠줄 자식을 원했다는 것도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체념이 낳은 내세 지복의 바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그가 눈을 뜨고자 하는 욕망이라도 품었다는 건 변화다. 심청이 곧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르나 딸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보려고 눈을 뜰 기회가 있다니 한번 해보자 불끈 욕망이 샘솟았는지 모른다. 이 기회조차 포기하면 진짜 앉은뱅이처럼 한 치 앞도 나아지지 못한 채 영원히 주저앉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당찮은 욕망임을 알기에 곧 후회하고 그는 이를 절대 딸에게 발설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어른이라면 아이에게 부담을 줄 말은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게 현명할 듯 보이지만 무의식의 욕망은 늘 이성을 마비시키고 마는 것일까. 아비의 근심 어린 모습을 걱정하는 심청이 재차 묻자 결국 자초지종을 입 밖으로 발설하고 만다. ’ 괜한 걱정 끼치기 싫어 아예 말 안 하려고 했는데 ‘ 하면서 말이다. 감당하기 어려울 법한 것을 은근슬쩍 드러내는 몽운이나 딸에게 불필요한 짐을 던지는 심봉사나 다를 바 없다. 미끼를 던지고 있는 꼴 아닌가. 듣지 않았다면 모를 일을 결국 듣고만 심청의 마음이 어떨까. 효를 위해선 제 살도 갖다 바쳐야 한다고 배워 온 심청이다. 아이 낳기를 소망하는 남편 의중을 몰았으나 이젠 알았으니 몸을 팔고 뼈를 갈아서라도 아이를 낳겠노라 했던 그 어머니에 그 딸일 터이다. 제사에 집착하다 아내를 잃더니 이젠 신이한 이적에 사로잡혀 딸을 잃을 상황을 그렇게 자초한 셈 아닌가.
몽운(夢雲). 뜬구름 같은 꿈이다. 갑자기 왜 그가 심봉사 앞에 나타난 것일까. 몽운과 심학규. 연기법緣起法이라도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유학을 신봉하던 그였다. 그러나 곽씨부인이 죽고 나선 유교적 관례와 예식이 점차 허무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법에 마음을 의지한 것인지도. 그러나 심봉사가 빠져든 불법은 유학의 예법이 삶의 현실과 괴리되었듯 신이한 이적과 물신 풍조와 짝을 이뤄 나타난다. 정신적 빈곤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징표다. 눈을 뜨고 싶다는 욕망은 있으나 그것을 타력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학규沈鶴奎. 성은 심(沈, 가라앉을 침)씨로 ‘물에 빠져 가라앉은 상태를 가리키고, 이름 학규鶴奎는 ‘두루미 학鶴과 반듯하게 걷는 모양 또는 법 규奎를 의미한다. 봉사라는 그의 처지로 보아 책을 읽고 법대로 학처럼 고고하고 반듯하게 걸으려 했으나 우물에 빠져 침체된’ 정신적 혼돈 상태는 어닐까. 심봉사는 개울에 빠졌고 훗날 심청은 인당수라는 바닷물에 빠진다. 이 복선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