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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보크 Nov 20. 2024

개울에 빠진 심봉사 2

장님과 앉은뱅이 설화 추적하기

 


- 개울에 빠진 건 심봉사만은 아니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그의 마음을 추적하는 나도 어지럽게 널린 관점들 사이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채, 한동안 이대로 영원히 앉은뱅이처럼 주저앉게 되진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으므로. 동병상련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유교 덕목 운운하며 군자 입네 하는 그의 위선을 발가벗기고 싶은 충동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점점 나와 다를 바 없는 그의 처지, 영원히 앉은뱅이 신세가 될까 봐 두려워하는 심봉사의 공포가 남 일 같지만은 않아 지니 말이다.-     


  심봉사는 스님에게 공양미 삼백석을 바치겠다고 큰소리치며 약속을 어기면 자신은 앉은뱅이가 될 거라고 여겼다. 왜일까 장님과 앉은뱅이, 둘 사이엔 어떤 인과가 있길래 눈을 뜰 거라는 은총의 희망이 앉은뱅이마저 될지 모른다는 심판의 공포와 짝을 이뤄 그의 마음을 어지럽힌 것일까.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다. 이와 관련된 설화엔 유독 장님과 앉은뱅이가 함께 등장한다. 장님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다고 전해지는 예수가 행한 기적이 그렇고, 앉은뱅이 지성이와 장님 감천이야기가 그렇다. 이야기를 들춰가다 보면 혹 심봉사의 어지러운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장님과 앉은뱅이에 관한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행복한 결말과 불행한 결말. 심봉사도 당시엔 둘 사이에서 자신이 어떤 결말을 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리라. 불안은 거기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지성이와 장님인 감천이. 둘은 서로 도우며 사이좋게 살자고 약속한다. 장님 감천이는 앉은뱅이 지성이의 다리가 되어주고 지성이는 감천이의 눈이 되어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의좋게 살아가자고 말이다. - 사실 모든 관계는 이렇게 시작된다. 심봉사와 곽씨부인도, 심봉사와 심청의 관계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은 냇가에서 금을 발견한다. 잠시 욕망이 일었지만 욕심부리다간 우정에 금이 갈까 봐 둘은 금을 그대로 두고 길을 가던 중 만난 나그네에게 금이 있는 장소까지 일러준다. 자신들에겐 필요 없으니 나그네가 잘 쓰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런데 나그네가 본 건 금이 아니라 뱀이었다. 화가 난 나그네는 뱀을 두 동강 내고 달려와 이 둘을 욕하고 떠난다. 기이하다. 나그네에겐 왜 금이 뱀으로 보였을까.

이상하게 여긴 지성과 감천이 그곳으로 가보니 이번엔 금이 정확히 두 조각으로 갈라져 있다. 나그네가 뱀과 같은 욕망을 저울추에 달아 정확히 평균값을 내준 셈이다. 욕망은 일지만 욕심을 비우고 나그네에게 금을 소개한 대가는 이들에 금을 정확히 나눠 갖는 행운으로 돌아온다. 욕심을 비워야 각자의 몫을 정확히 셈하는 법을 알게 된다는 이치일까.


이후 이들은 함께 길을 가던 중 마침 큰 절을 짓기 위해 시주를 받으러 가는 스님을 만나 자신들이 가진 금을 아낌없이 시주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집으로 돌아와 오순도순 지낸다. 바라는 것 없이 아낌없이  줄 수 있는 무상 보시의 단계에 이른 것이리라. 

이로부터 십 년이 지난 후, 어느 날 이들은 염불소리를 따라 들어간 절에서 이상한 빛이 새어 나온 것을 보게 된다. 이 때 놀란 감천이가 업은 지성이를 떨어뜨리고 마는데 그 순간 지성이는 일어서고 감천이는 눈을 뜨게 . 서로 돕고 의지하며 욕심 없이 살아가는 착한 심성을 보고 하늘도 부처도 감동하여 둘의 질병이 치유되었다는 행복한 결말이다. 이 이야기는 욕망을 비워가는 여정으로  각각의 단계를 잘 통과함으로써 기적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는 마음의 신비들려주는 듯 보인다.


 반면  이와 다르게 전개되는 결말도 있다. 이야기의 앞부분은 비슷하지만 금을 발견한 앉은뱅이 지성이 욕심을 부리면서부터 달라진다. 눈이 밝은 앉은뱅이 지성이 금을 발견한 후 장님 감천이에겐 금을 적게 주고 자신은 점점 더 많은 금을 차지한다. 그러자 앉은뱅이 지성이를 업고 가는 감천이 지성의 몸무게를 감당못해 짓눌려 죽고, 지성의 다리 역할을 해줄 감천이 없으니 지성도 영원히 앉은뱅이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어쩐지 장님과 앉은뱅이의 처지가 심봉사와 심청의 관계 같다. 심봉사의 무리한 욕망이 심청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으니 말이다.

 장님과 앉은뱅이 설화는 ‘나와 너’, 관계의 균형에 관한 이야기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부부관계든 부녀 관계든 모든 관계는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공평할 땐 서로 상생하여 곱절의 기적을 불러올 수 있지만 균형을 잃고 한쪽이 제 욕망을 앞세워 다른 반쪽을 희생시키면 결국 가진 쪽도 모든 것을 다 잃게 되음양의 이치 일러준다고. 인과의 시간차 때문에 쉬이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 우주 변화 원리는 그렇다고.


 아울러 이 설화는 바라는 것 없는 무심한 마음으로 보시한 것만이 훗날 치유의 기적을 낳는 원인이라고 일러준다. 그렇다면 눈을 뜰 것이라는 전제조건을 깔고 공양미 삼백석을 바치는 행위는 결괏값을 먼저 계산한 행위로 설화의 인과가 뒤바뀐 꼴이 된다. 결과값에 대한 기대심리에서 비롯된 모방행위는 자칫 혹부리영감의 친구처럼 혹 떼러 갔다가 혹 하나 더 붙이는 꼴로 끝이 나고 말 수도 있다. 그저 마음의 흥을 즐기다 도깨비한테 혹을 주고 복을 받은 혹부리 영감이나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연민의 감정에  의해 제비 다리를 고쳐 주고 뜻밖의 행운을 얻은 흥부의 태도는 무위 자연, 성스러운 마음 자리와 접촉한 상태라면 이들과  달리 갑절 행운을 바라는 맘으로 이들을 모방한 혹부리영감의 친구나 놀부의 경우는 욕심과 기대심리에 기반한 인위적 행위였기에 과정의 즐거움도 없고, 기대할 만한 결과에도 이르지 못하리라. 만족할 수 없는 자신의 욕심보 때문에라도 기적을 발견하기 쉽지 않을터이니 이중의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심봉사는 자신의 행위가 자칫 이런 결과를 불러들일지도 모른다고 여겼기에 딸에게 절대 발설하지 말자고, 적어도 그의 이성은 그렇게 다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을 압도하는 무의식의 욕망이 결국 이를 입 밖으로 내뱉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개울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심봉사. 그는 기적이라는 희망 회로와 심판이라는 절망 회로 사이에서, 더 나은 생에 대한 자신의 강렬한 욕구와 딸 심청을 불행에 빠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사이에서, 갈팡질팡 분열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이 눈을 뜨면 딸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여기며 덜컥 시주를 약속했지만, 이러한 자신의 욕망이 딸 심청을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자신이 딸 심청과의 관계에서 앉은뱅이 지성이와 같은 짓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의 무의식은 어렵풋이 눈치채고 있었는지 모른다고. 그래서 영원히  앉은뱅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내면을 어지럽게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제  나는 그를 무조건 비난만 할 수도 없다. 나의 내면에도 도사리고 있는, 철저하게 ‘나’를 우선시하는 무의식적 생의 충동과 ‘너’와의 관계 윤리 사이에서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언제든 너를 희생양 삼을 수 있는 욕망이 내 속에도 얼마나 무섭게 똬리를 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므로.

    


 덧.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라 했던가. 장님은 예수의 옷자락을 붙잡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간절히 구했고, 기적처럼 눈을 떴다. 그러자 그에게 예수는 말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한 것뿐이라고. 사람들은 예수가 일으킨 기적이라 믿지만 정작 예수는 기적의 주체는 장님 그 자신이라고 한 셈이다. 예수 말대로라면 분명 기적을 일으킨 주체는 장님의 믿음이지 예수가 아니다. 자력이지 타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도 모두에게 기적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아 기적의 신비란 장님은 예수 덕분이라고 믿고 예수는 네 믿음의 결과라고 하는 관계의 상호 작용.  즉 기적의 신비란 지성이와 감천이처럼 욕심 없는 마음으로 상호작용하는 결괏값에서 피어난 우주적 춤은 아닐는지. 인간의 지성스런 마음의 결과로 일어나는 천지와의 소통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쉬울까. 지성이와 감천이와 같은 심성조차도 십 년이 지나고 난 후에야 기적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심봉사와 심청. 이 둘은 앞으로 어떤 우여곡절 끝에 이러한 기적의 신비에 다다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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