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의 부부 관계를 추적하라 1
1. 심봉사의 아내 곽씨 부인 편
1. 심봉사의 아내 곽씨 부인 편
“‘옛글에 이르기를, 자식으로서 불효하는 일이 삼천가지인데 그 가운데 가장 큰 불효가 자손이 없어 조상의 대를 잇지 못한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자식이 없는 것은 첩의 죄로 응당 내쳐짐이 마땅하나, 군자의 넓은 덕으로 지금까지 보존하니, 자식 두고 싶은 마음이야 몸을 팔고 뼈를 간들 못하리라까 마는 다만 형편이 어렵고 가군의 성정을 몰라 입 밖으로 내지 못하였으나, 먼저 말씀하시니 지성껏 하오리다.’ 하고 품을 팔아 모은 재물로 온갖 공을 다 들이더라.”
치성을 드려보라는 심봉사에게 아내 곽 씨가 한 답변이다. 자식 못 낳는 것이 칠거지악 중 하나였던 사회. 그녀는 남편이 자식을 원하는 마음을 드러내자 자신이 죄인임을 먼저 상기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죄의식을 내면화해 온 것일까. 그녀 말대로 남편 덕에 쫓겨나지 않고 살고 있다 믿었다면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이를 낳는 것이 실제 자신의 소망이라면 왜 그것이 몸을 팔고 뼈를 갈아서라도 낳겠다는 비장한 선언을 필요로 할까. 그녀의 무의식은 이미 그것이 자신의 목숨값이 될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 부부의 화법은 참 묘하다. 상대를 위하는 듯 보이지만 돌려 까기 신공들이다. 자신은 자식을 원하지만 경제적 형편과 네 성정을 생각해 참아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식 못 낳은 건 기실 내 죄가 아니라 네 죄라고 항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장님 봉양하느라 뼈 빠지게 고생했더니 분수도 모르고 욕심이 끝이 없구나. 그래도 애 못 낳는다 소박은 하지 않을 위인이라 여기며 지성으로 보살폈더니 뭐 치성을 드리라고? 그래, 좋다 정 원한다면 몸을 팔고 뼈를 갈아서라도 기어코 낳아 내겐 죄가 없음을 증명해 주고 말리라.’ 내겐 그녀의 말이 이렇게 들리니 말이다.
지성이라 감천일까? 지성으로 빈 덕에 선녀가 내려오는 태몽을 꾸고 아이를 낳았으니 소원 성취다. 그러나 과연 누구를 위한 소원일까. 딸의 탄생이 어미의 목숨값이 되고 말았으니 꿈을 이룬 대가가 서늘하다.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는 것도 공짜는 아닌 모양이다. 결핍에 대한 간절한 욕구. 그것은 무언가를 이루는 원동력인 동시에 그만큼 값을 치러야 하는 그늘임을 심봉사는 왜 모를까.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봉양해 줄 아내를 잃고 말았으니 말이다.
곽(廓성)씨. 그녀는 오랫동안 불쌍한 남편의 든든한 성곽 역할을 해주는 헌신적인 여성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그런 해석이 나는 불편하다. 내겐 곽(廓성)씨라는 성이 오히려 ‘감옥’이나 무덤 속 관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유교 사회가 그린 이상적 페르소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살다 간 여인. 자식까지 낳았으니 당시 사회가 부여한 아내로서의 의무를 모두 해낸 집념의 화신인 동시에 그녀는 가부장적 집단윤리의 희생양일 수 있다. 왜 마흔이 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을까. 역할의 무게에 스스로 짓눌려 살았던 탓은 아닐까. 그녀가 자연스레 자신의 욕구를 분출해 본 적 있을까. 생의 기쁨을 온전히 느껴 본 적 있을까. 유교적 여성상에 부합되기 위한 그녀의 강박이 역설적으로 있는 그대로 생 자체를 사랑할 수 없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싶지도 않았으리라. 자식을 원치 않는 마음과 자식 못 낳는 죄의식 사이의 양가감정이 그녀의 내면에서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불임은 종종 옛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한다. 성경 속에도 아이를 원했지만 오랫동안 불임으로 고통받은 많은 여성들( 사라, 라헬, 한나)이 있다.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여성의 불임 속엔 비슷한 패턴이 발견된다. 집단의 규범을 내면화해 왔으나 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할 때 느끼는 자책이나 죄책감, 혹은 개인적인 수치심 등이 불임의 원인이었음을 엿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의식이 해방되어 갈 때 비로소 출산의 기쁨이 찾아옴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있다.( 이러한 예는 후에 차차 밝히기로 한다.) 옛이야기에 등장하는 불임은 가족 혹은 사회의 집단의식이 개인 또는 그 사회 전체의 생명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표이기도 했다. 곽 씨 부인의 경우도 그렇다. 그녀의 내면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바로 심청을 낳기 전 태몽이다.
태몽으로 본 곽씨부인의 심리
“소녀는 서왕모의 딸로 복숭아를 바치러 가는 길에 옥진 선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늦어 상제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 사는 세상으로 쫓겨나 갈 길 모르고 있었더니 여러 신령님과 보살님들이 부인 댁으로 가라 가르쳐주나이다. 어여삐 여기소서”
곽씨부인의 태몽 속에서 심청은 서왕모의 딸로 등장한다. 꿈을 자신의 무의식적 소망, 자기 충족적 예언을 반영하는 거울이라 한다면, 곽씨부인은 의식적으로는 조상의 대를 이을 아들을 원했지만 무의식은 정반대의 꿈을 꾼 셈이다. 심봉사도 한날한시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니 그 역시 딸을 원했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왜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을까. 그것도 서왕모의 딸일까! 공통된 꿈을 품고 있었다면 이 꿈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집단무의식의 투영일 수 있다. 의식되지 못한 자신들의 무의식적 소망을 심청을 통해 실현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서왕모의 딸이라는 심청의 정체성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서왕모는 곤륜산에 거처하는 중국 최고 여신으로 하늘의 온갖 재앙과 형벌을 관장한다. 죽음과 파괴를 가져오는 여신인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상징인 불사약을 전해주는 여신이다. 그녀의 양면성은 형상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봉두난발의 머리에 표범 꼬리와 호랑이 이빨을 지닌 채 머리엔 옥비녀를 꽂은 형상으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모습이다. 본래는 최고의 지위를 누렸으나 유가 사상이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고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질서 체제가 공고해지면서 그녀의 지위는 축소되다가 한나라 후대에 이르러서는 여신의 형상 중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은 지워진 채 온화하고 자애로운 특성만이 강조되었다. 이후 아이를 낳도록 도움을 주는 존재 정도로 민간 신앙을 통해서만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다음은 <한무고사>에 실린 대목으로 한무제가 불사약을 얻고자 하여 서왕모를 찾아가자 그녀가 내놓은 답이다.
“제(帝)께서는 정(情)을 막아 내보내지 않으시어 수심이 아직도 많아 불사약을 드릴 수 없다”
(여와의 오색돌, 70)
이는 도덕과 윤리, 이성과 합리를 강조한 한무제로 대표되는 유가의 통치 질서가 정의 세계 즉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을 억압하여 삶의 활기와 생명력을 빼앗고 있음을 일러 준다. 그렇다면 서왕모의 등장은 심봉사 부부가 사는 공간 역시 정의 세계가 막혀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부부가 동시에 이 꿈을 꾸었다면 이들은 모두 억압된 감정 영역, 정의 세계를 살려내어야 함을, 심청은 바로 그런 역할을 부여받고 지상에 내려온 여인이라 할 수 있다. 왜 아들이 아니고 딸인가. 예부터 이성 즉 로고스는 남성적 원리로, 감정 즉 에로스는 주로 여성적 원리로 상징되어 왔다. 가부장적 질서가 강조된 사회에서 부부는 모두 유교적 이상을 실천하려고 애쓰느라 자기 내면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분출하지 못했으리라. 오랫동안 생명을 잉태하지 못한 까닭이, 곽씨부인을 죽음으로 내몬 까닭이 거기 있으리라. 서왕모가 죽음과 파괴의 신인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힘을 주는 불사약을 전하는 신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겨울이 없으면 봄을 맞을 수 없듯 죽음 없이 생명은 잉태되지 않는다. 그것이 자연의 원리다. 정의 세계의 회복을 위해선 먼저 이전의 세계관이 종말을 맞아야 한다. 그것이 의식의 변환 여정이다. 따라서 곽씨부인의 죽음은 가부장적 봉건윤리와 유교적 인습에 대한 심판적 성격을 띠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꿈은 자신도 모르는 마음을 일러주는 무의식의 창이라고 하지 않던가. 서왕모의 딸 심청은 곽씨부인의 무의식이 바라온 새로운 정신의 출현의 암시일 수 있다. 그렇다면 심청이 이 세계에서 실현해야 할 과업은 우리가 익히 알아 왔던 것과 사뭇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