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친구들과 딱지치기를 많이 했다.
신문, 책, 달력 닥치는 대로 뜯고 접어서 친구들과 한판 승부를 할 때면 몸에 전율이 돌았다.
딱지 중에서도 무게가 나가고 잘 넘어가지 않는 딱지, 한번 치면 바닥이 울리는 딱지.
그걸 친구들은 ‘복딱지’ 라고 불렀다.
줄여서 ”복따‘ 라고 했다.
복따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만듦새부터 이런저런 하급한 종이나 책과는 달리 고급 잡지에 코팅된 컬러 용지로
정성스레 몇 겹을 접어서 만든 무겁고도 강력한 딱지였다.
무게감이 있어서 상대방이 넘기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상대방 딱지를 넘길 때도 작은 힘으로 강력한 능력을 발휘했다.
보통은 딱지 열 장이면 복따 한 장씩 끼워서 친구들과 딱지치기를 했다.
그 시절 나의 딱지 열정은 대단했다.
손가락이 벗겨지고 피가 나고 손톱이 깨지는 것도 모른 채 팔을 휘둘렀으며
그 상처가 아물어 굳은살이 되면 더더욱 영광의 상처로 여겼다.
딱지 치느라 밥을 먹는 것도, 좋아하는 만화가 티비에서 나오는 시간도 잊어버렸다.
결국 난 우리 동네 딱지 대장이 되었다.
주변 다른 동네도 원정을 다녔는데 마땅한 적수가 없이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윗동네에 한 녀석이 이사를 왔는데 딱지를 잘 친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음날 승부욕이 생겨 딱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5장이면 충분하려나? 아니지 혹시 모르니 복따까지 해서 10장 챙기자!‘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윗동네로 향했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녀석도 들었는지 구경꾼 서너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니가 딱지를 그렇게 잘 친다며?”
“뭐 글쎄~ 하하”
긴 말이 필요 없었다. 가위바위보로 먼저 칠 사람을 정했다.
“가위 바위 보!”
내가 졌다. 난 딱지를 내려놓았다.
딱~ 발라당
내 첫 딱지는 너무나도 쉽게 뒤집어졌다.
더더욱 놀란건 그 녀석의 딱지치는 동작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동작에 매우 많이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내가 위에서 내리찍는 자세라면 그 녀석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스치는듯한 자세로
딱지를 후려쳤다. 마치 정통파 투수와 사이드암 투수의 대결 같았다.
2번째 3번째 심지어 9번째 딱지도 그 녀석은 한방에 넘겼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나에겐 마지막 자존심인 복따가 있지 않은가!!
복따를 후후 불고 가지런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녀석은 무언가 다른 듯 힘껏 스윙을 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말아야 할 복따가 들썩이더니 발라당 넘어갔다.
’아아~ 이럴 수가!!!‘ 완패였다.
난 얼어버렸다. 믿어지지 않는 이 순간이 꿈이길 바랐다.
’내가... 내가... 이 딱지 대장이... ‘
’단 한 번의 공격도 없이 한방에 10장을 내리... 아아~‘
너무나도 허무했고 창피했다.
“끝났나?”
그 녀석은 한 쪽 입꼬리만 올리면서 씨익 웃더니 그대로 가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밥맛도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 녀석의 비웃는 듯한 표정이 자꾸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아... 복따를 만들자 복따를...
무게를 무겁게~ 무게를 무겁게~ 넘어가지 않게...
계속 생각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기고 싶다 녀석을 이기고 싶다.
이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젖은 딱지가 생각났다.
비 오는 날 마당에 떨어져 있던 딱지..
잔뜩 물을 먹어 무거워진 딱지는 말려도 무게가 여느 딱지와는 달랐다.
이거다!!!! 으하하하하
난 고급 잡지에서 속지를 부욱부욱 뜯었다.
몇 겹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무척 두꺼웠다. 몇 겹의 종이로 정성스럽게 딱지를 접었다.
완성된 복따를 세숫대야에 넣고 물을 부었다.
나의 귀중한 이 복따가 물을 흠뻑 먹을 수 있도록...
다음으로 흠뻑 젖은 복따를 그늘에 말렸다
며칠이 지나니 복따는 물기가 쫘악 빠지고 표면이 거칠었다.
무게는 생각했던 대로 여느 복따와는 차원이 달랐다.
바닥에 놓고 다른 딱지들로 사정없이 후려쳐도 복따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완성되었다.
나의 물복따가...
다음날 나는 복따와 함께 딱지 열 장을 챙겨 녀석에게 달려갔다.
나를 비웃던 그 입을 찢고 싶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위바위보를 시작했다.
몇 번을 비기더니 내가 이겼다. 우린 각각 딱지 10장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그 녀석이 먼저 딱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가 후려쳤다. 넘어갔다. 또 또 넘어갔다.
그 녀석이 말했다.
“어쭈 좀 친다? 제법이네! 역시 소문이 다 거짓말은 아니었네~ ”
하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녀석은 네 번째 딱지를 내려놨다.
네 번째 딱지를 후려쳤지만 반쯤 넘어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 젠장’
그 녀석의 공격 차례였다.
여기서 신중히 생각을 잘해야 했다.
물복따는 한 장!!
저 녀석이 혹시라도 저번처럼 한 번에 다 넘긴다고 가정을 하면 아무리 물복따라도
19장을 다 넘길 때까지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승부를 걸었다.
바로 물복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휙 딱.. 소리는 제법 컸지만 물복따는 미동도 없었다.
당황한 녀석의 표정이 볼 만했다.
물복따로 손쉽게 4,5,6,7 번째 딱지를 모두 넘겼다.
8번째 딱지를 바닥에 내려놓는 녀석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텅!”
녀석의 8번째 딱지를 둔탁한 소리 와 함께 넘기긴 했지만 뭔가 무게감이 틀렸다.
그것은 복따였다!
녀석도 복따를 준비한 것이었다!!
그럼 나머지 두 장도 다 복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난 복따가 한 장인데...
뭐 복따의 갯수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으레 한 장씩 들고 다니던 복따를 세 장씩이나 준비하다니 치사한 놈...
이건 딱지 세계의 룰 아니던가!! 이런 비열한!!
아무튼 녀석의 9번째 딱지가 바닥에 내려졌다.
난 사정없이 휘둘러 그 또한 넘겨 버렸다..
10번째 딱지가 들어서는 순간 난 이겼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마음은 이미 승리에 심취해 있었다.
10번째 딱지는 살짝 크기가 큰 복따였다.
힘껏 후려쳤지만 살짝 흔들릴 뿐 별 반응은 없었다.
그 녀석 차례.
특유의 동작으로 내리쳤지만 물복따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 주고받기를 서너 번 상대방 딱지를 넘기는 이가 없었다.
다시 그 녀석 차례!!!
골똘히 생각하던 녀석은 나랑 같은 동작으로 딱지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아뿔싸! 녀석이 내 자세를 모방한 것이었다.
텅! 소리가 나더니 내 물복따가 솟구쳤다.
내 물복따가.. 떠올랐다.
‘안돼!!’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물복따는 대굴대굴 구르더니 저만큼 가서 넘어졌다.
우리는 후다닥 뛰어가 딱지를 확인했다.
‘넘어간 것인가??’
다행히 넘어가지 않았다. 딱지는 앞면으로 놓여 있었다.
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이 아닌 이 녀석이 요령은 터득했고
바뀐 자세로 공략하면 물복따를 넘기는 건 시간문제인데...’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승부를 걸어야 한다.
여기서 끝내야 된다고 생각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심호흡을 했다.
‘그래 나도 한번 그 녀석을 따라 해보자.‘
녀석의 폼으로 쳐봐야겠다고 생각을 마친 뒤 머릿속으로 녀석의 자세를 그렸다.
약간 어설픈 녀석의 폼으로 딱지를 내리쳤다.
나의 딱지가 지나간 후 한참만에 그 녀석의 딱지가 들썩이더니 발라당 넘어갔다.
’아!!‘ 가벼운 탄식과 함께.
승부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겼.다. 내가 이겼다.
내가 녀석을 발라 버린 것이었다.
“좋냐?”
녀석은 저번처럼 씨익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자식아”
난 승리했다.
“하하하하하하!!!”
이겼다. 누가 뭐래도 내가 이겼다.
나는 가슴 가득 20장의 딱지를 안고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늠름하게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와서 공부 안 하고 어딜 싸돌아다니냐고 어머니께 꾸중을 들었지만
너무도 너무도 너무도 기뻤다.
그날은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한 채 쉬이 잠을 청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