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절제술

by 감자발

잠결에 부모님의 대화가 들렸다.


”누구누구도 하고 다 했다네요~ 우리 애들도 이제 때가 된 거 같네요~“

”곧 방학이니 둘 다 데리고 가요~“


역시 드디어 올 것이 와버렸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동생은 2학년이었다.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심 가슴이 콩닥 거리고 무서웠는데...


방학이 되자마자 어머니는 우리 둘을 데리고 ‘고려 의원’으로 향했다.

난 무엇을 하러 가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동생은 뭣도 모르고 형이 가니 따라나섰다.


의원 안은 많은 인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근처 다른 곳보다 비용이 싸다고 소문이 나서 많은 아이들이 몰려 있었다.

92년 그때 기억으로 비용은 3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병실 안에서 수술을 끝마친 아이들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울상을 하며 나왔다.

동생과 나는 다른 병실로 각각 들어갔다.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병실.


비슷한 또래의 한 아이가 바지춤을 올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넌 이제 죽었다!“

겁을 주며 나가는 그 아이를 빤히 쳐다봤다.

수술하러 온 것은 아니고 소독하러 온 것 같았다.

포비돈이 잔뜩 묻은 솜이 스텐케이스에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아이가 나가고 난 하의를 모조리 벗고 순한 양처럼 병상에 누웠다.

간호사가 들어왔고 웃으며 금방 끝나니 긴장을 풀라고 다독여 주었다.

13살 나이에 여자 간호사분 앞에서 하의를 벗고 있으려니 여간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몇 분 뒤에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다행히 남자분이셨다.

나의 소중한 부위를 살펴보시더니 갑자기 밖에서 대기 중이던 어머니를 부르셨다.


“아 어머님 저기 이 아이는 수술이 좀 까다로울 수 있어서 추가 비용이 발생하겠습니다.”

“네~”


어머니는 내 소중한 부위와 의사 선생님의 얼굴을 번갈아 보시더니 대답을 하시고는

나가셨다.


”따금해요~“

주삿바늘이 내 피부에 박혔고 주변은 감각이 없어졌다. 마취였다.

흡사 와인 따개같이 생긴 기구를 이용해서 겉껍질을 잘라내니 속에 있던 새빨간 피부가 드러났다.

좀 징그러웠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눈을 감았다. 뭐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잠시 후 수술이 끝나고 종이컵을 대고 속옷을 입은 후 병실에서 나왔다.

곧이어 동생도 엉거주춤 병실에서 나왔다.

어머니는 9만 원을 결제하셨다. 난 따블이었다.


”마취가 풀리면 통증이 있을 거예요~ 진통제 꼭 챙겨 먹이세요~“

간호사의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와 택시에 몸을 실었다.

별다른 통증은 없었다. 아니 감각이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 우린 방바닥에 나란히 속옷만 걸치고 누웠다.

슬슬 얼얼한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진통제를 미리 먹긴 했지만 생살을 잘라낸 고통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으으으으~ 쓰읍~~“

나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지만 예상을 했던 터라 참으려고 노력했다.


”아~아악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가뜩이나 엄살이 심한 나이 어린 동생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얼마나 아팠으면 엄마에게 욕을 하며 소릴 질렀다.


”아 아악~ 엄마 어떻게 해봐 너무 아파~ 와 나를 왜 이렇게 아프게 하는 거야!!!

이년아 뜨거워 부채질해 부채질하라곳!!! 아 뜨거~~ 이년아!!“


그랬다. 너무나 뜨겁고 쓰라렸다.

정말 신음 소리만 낼 뿐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의 속옷을 아예 벗겨 버리고 부채질을 하셨다.

동생한테 진통제 하나를 더 먹이시더니 약국으로 향했다.


”저기요 애들 포경수술을 했는데 진통제 좀 센 거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너무 괴로워해서요~“


어머니는 좀 더 강한 진통제를 우리에게 먹이셨다.

그래봐야 살짝 고통이 덜할 뿐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동생은 한참을 더 고래고래 소릴 치고 욕을 했다.

이내 지쳐서 기절을 한 건지 잠을 자는 건지 조용해졌고

옆에서 나도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면서 동생과 나를 번갈아 보는데 정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게 뭐 하는 건지...’

어머니는 땀으로 범벅이 된 두 아들의 얼굴을 닦아내며 웃고 계셨다.


며칠이 지나자 속살이 컵이나 속옷에 닿을 때 느껴지던 고통도 무뎌졌다.

이제 좀 살만했는지 동생과 장난을 치다 그만 실밥이 터져 다시 병원으로 갔다.

그날 어머니에게 심하게 꾸지람을 들었다.


”적당히들 해라 좀! 그 고생을 하고도 장난을... 아이구“

실밥이 터진 건 동생이었기에 꾸중은 내 몫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매질은 피할 수 있었다.


수술–소독–실밥제거의 과정을 거쳐 우린 열흘 만에 해방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고래를 잡았다.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도 아찔한 그때 기억을 생각하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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