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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Y Jun 11. 2022

나의 퀘렌시아(Querencia)

늦잠을 자고 싶지만 7시에 눈이 떠졌다. 조금만 더 오래 누워 있고 싶은데 사방으로 나를 둘러싼 아이들 틈에서 비집고 일어나 다른 방에 가서 좀 더 눈을 붙였다.


8시 30분. 더 늦기 전에 일어나 내일 쓸 교회 주보를 만들어야 한다. 지난 전교인 수련회 사진을 정리해 지면을 채우느라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더 작업을 해야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이들의 자전거를 싣고 아라뱃길에 가는 거였는데 아버지가 출근을 하셔서 일정이 꼬여버렸다. 첫째 아이는 친구를 데려와 키즈카페에 가야 한다며 용돈을 달라고 한다. 종일권을 끊겠단다. 일반 키즈카페가 2시간에 16,000원인데 여기는 하루 종일 놀아도 8,000원이다. 싼 값이지만 현금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 싫다고 하니 친구와 함께 면전에서 내 험담을 한다. 짠순이 엄마라고. 가족들과 비교하며 엄마의 순위가 꼴찌라는 걸 상기시켜주는데 딸보다는 맞장구치며 버릇없이 구는 딸의 친구가 더 얄밉다.


기분이 푹 가라앉았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방향을 잃었다. 잠시 아이들이 놀이터로, 키즈카페로, 컴퓨터 앞으로 흩어진 틈을 이용해 기말고사 시험을 하나 치르고, <아마존의 눈물>을 다시 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살아가는 아마존의 원주민을 삶을 엿보며 자족을 배운다. 이미 많은 것을 소유했는데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의 동요를 잠시나마 잠재운다.


그러나 결국 요동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집 근처 카페로 갔다. 모든 것에서의 단절. 오롯이 나만 남는 시간. 책을 읽었다. 활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지만 혀끝을 감도는 묵직한 카페라테의 거품이 기분을 안정시킨다. -4%로 급락한 주식을 확인하면서 책을 읽는데 '염려'에도 안식이 필요하다고 한다.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하신다.


내 마음의 동요와 염려를 기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이곳이, 이 순간이 나의 퀘렌시아(Querencia)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묵상을 마치고 카페를 나서며 몸과 마음이 정화된 상쾌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의 안식, 영혼의 안식, 생각의 안식. 모든 것의 안식처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의 참 평안과 회복.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충분했다.




퀘렌시아(Querencia)

스페인어인 퀘렌시아는 투우장 한쪽에 소가 쉬는 구역을 말한다.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으며, 지정된 장소도 아니다. 투우 경기에 나선 소가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칠 때,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으는데 바로 그곳이 소만 아는 퀘렌시아다.


투우가 진행되는 동안 소는 어디가 자신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이며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인지를 살피는데 그곳(퀘렌시아)에 있으면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따라서 투우를 이기기 위해는 반드시 소가 퀘렌시아로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퀘렌시아에 있을 때, 소는 말할 수 없이 강해져서 쓰러뜨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썼다.


나의 퀘렌시아는 피난처이신 하나님이시다. 카페나 신앙서적은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세상으로부터 나를 분리해주는 물리적 공간일 뿐이다.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힘을 얻고 쉼을 얻는다. 휘몰아치던 내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한다. 좀 더 음미하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나를 찾는다.


충분히 안식했기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몸과 마음, 영혼 깊이 평안이 감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안. 나의 주 안에서의 안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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