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이 불여일견
일적으로나 인간관계에 번아웃이 왔던 시기였다.
무얼 보고 사는지 회의감이 온 가을이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일탈이 간절했던 11월이었다.
또 산이 가고 싶어 졌다. 11월엔 내 생일도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내 이름으로 된 가은산을 검색해봤다. 충북 제천에 가은산이 있다는 것을 보고 나는 친구에게 또 시동을 걸었다.
해발 1950m 한라산도 다녀왔으니까
575m 가은산은 더 찾아볼 것도 없어. 몸만 다녀오자.
이때 까진 몰랐다. 가은산에게 호되게 당하고 올 줄은..
나의 가은산 일기
생일맞이 내 이름의 산을 타고 싶어서 무작정 충북 제천으로 갔다. 사실 후회도 조금 했다. 조금만 더 정보를 알고 갔으면 도전 안 했을 수도 있다. 그만큼 너무 힘들었던 산행이었다. 산에 대한 기만이었을까? MBTI 계획형의 J라 원래는 찾아보고 가는데 그전에 한라산 한 번 간 걸로 거만해져서는 해발만 보고 야산에 된통 당하고 왔다. 가은산은 난생처음 본 생야산이었다. 길이 확실치도 않고 바위를 올라타야 했다. 산을 타면서 생과 사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발 한 폭만 한 좁은 길에 양쪽은 낭떠러지다. 친구와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산행을 했다. 그만큼 진지했다. 살아서 가게만 해준다면 오늘부터 삶을 주체적으로 열심히 살 거라고 기도까지 했다. '살고 싶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길이 뚜렷하지 않은 산을 가다가 엎어졌다. 친구에게 이 길이 맞냐고 물어봐도 소용없다. 친구도 처음이라서.
나는 흔들리는 돌에 두 무릎을 찧었다. 그때 저 멀리서 산행하시는 아버님들이 느긋하게
어이고~ 좋은 길 놔두시고 왜 ~
아차 싶었다. '왜 나는 당장의 길만 보며 멀리 보지 못했던 걸까?' 그때부터 멀리 보려고 노력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편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유롭게 멀리 보면 보이는데 당장의 앞길만 보니
급한 마음에 앞을 볼 수 없던 것이었음을.
고비가 왔다. 길이 더 이상 없어서 저기 앉아있는 아버님께 길이 어디냐고 물어봤다. 근데 바위 쪽을 가리키시면서 "이 바위가 길이에요." "네? 여긴 길이 없는데요." "이 바위 타고 올라가면 또 길이 나와요."
'나 참 바위가 길일수가 있나... ' 믿고 싶지 않아서 세 번은 물어본 것 같다. 여기까지 와서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방비한 손으로 거친 바위의 길 위에 올라섰다. 친구와 살아서 가자고 무표정으로 말하던 게
기억이 나서 일기 쓰는 지금도 웃음이 난다. 가은산은 산의 1차원적 굴곡처럼 세모 모양이 아니라 물결모양으로 산행을 해야 가은산에 도달할 수 있다.
해발만 믿고 이젠 가지 않으리라.
다시금 겸손의 큰 깨달음도 얻는다.
가은산에 도착해서 나는 내 이름이 반가웠으나 하산할 생각에 심란함이 8할을 지배했다.
거두절미하고 일단 월악산 안에 위치한 가은산의 절경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정말 예뻤다. 그나마 후회하지 않았던 이유는정말 그림 같았기 때문에. 저 멀리 산과 어울려 있던 호수를 내려다보니 오묘한 색을 띄우는 게 동화에 나오는 마을을 연상 캐 했다. 이 마을은 언제나 평화로웠을 것이다.
어느 정도 사진과 눈으로 가은산을 담고 하산을 하려는데 혹시나가 역시나 가 됐다. 오르막길이 있고 바위길을 틈틈이 나왔다. 이쯤 되니 놀라는 것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길만 나와도 친구와 정말 기뻐했다. 지도 맵을 켜서 우리가 가려던 음식점까지 20분 정도 남았을 때 끝이 보인다는 희망에 열정적으로 하산을 하는 순간
저 멀리 밧줄이 보였다. 밧줄밖에 길이 없었다. 그것도 한 줄이 아니라 연달아한 네 줄 정도.
뭐 어쩔 수가 없다. 여기서 밧줄 타고 내려가지 않는다면 우린 뼈해장국도 못 먹고 집도 못 간다. 어쩔 수 없이 우린 살기 위해 밧줄을 타고 내려오게 된다. 나와 친구는 이제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강해지고 싶다면 가은산을 추천해주고 싶을 만큼 힘든 산행이었다. 밧줄이 더 이상 보이지 않고 평지의 사과밭이 보일 때쯤에 비로소 친구와 나는 울먹거렸다.
드디어 평지구나!
친구랑 나는 눈물이 맺힌 채로 뼈해장국을 먹으러 갔다. 밥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으면서 막걸리까지 반주로 한 잔 했다.
또 하나의 관문
가은산에서 제천 시내까지 가는 교통편도 너무 안 좋았다. 음식점 사장님이 오만 원만 주면 좋은 차로 숙소까지 태워다 준다 했는데 왠지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상술인 것만 같아 친구에게 무작정 히치하이킹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자 내 친구는
저 악산도 내려온 마당에 못할게 뭐 있냐.
' 그래 못할 게 뭐야? 우리 밧줄 타고 하산한 여자들인데 '
어디서 나오는 강단함인 건지 나도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엄치척을 시작으로 히치하이킹을 시작한다. 친구는 다른 방법을 찾자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옆에서 쌍엄지 척을 들고 있다. "이렇게 하면 되겠지? 저기요!"
사람이 살고자 하면 뻔뻔해진다. 거절당하는 것도 제법 당해보니 괜찮았다. 그때 어떤 어머님이 멈춰 섰다.
제천 시내버스 있는 곳까지 태워 주신다 하셨다. 우린 감사의 말을 전하고 차에 탔다. 아주머니는 요양보호사라고 했다.
나는 사람들이 너무 좋아 정이 많은 사람이야.
그 말에 난 "그럼 상처 많이 받지 않나요?" 평소에 이런 오지랖을 부리지 않는데 한참 당시에 친한 친구와도 다투고 연애도 실패하고 많은 걸 잃고 있을 시점이라 감정적인 말이 툭 하고 나와버렸다.
정이 많아서 사람들한테 상처도 많이 받지만
그냥 이게 내 성격이라
이렇게 사람들 사랑하면서 살기로 했어요.
어차피 사람들이랑 어울려 살아야 하는 건데 뭐.
그 말을 듣고 나는 청승의 눈물을 흘렸다. 사실 왜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그 아주머님은 다음에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며 제천을 투어 시켜준다고 번호를 주시곤 우리를 버스정류장에 내려다 주셨다. 내려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머님이 다시 오셔서 커피 두 잔을 주시고 갔다. 더 이상 어떻게 따뜻할 수가 있을까.
계속 참아왔던 눈물을 참지 못하고 친구 앞에서 펑펑 울었던 것 같다.'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따뜻함을 느끼는 존재였구나.' 버스를 기다리는데 주말이어서 그런지 버스가 한대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또 우린 엄지를 들며 히치하이킹을 시작했다. 재미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해보는 것들이라 초심자의 행운을 기대했으려나?'
셌으면 100번은 넘었을 테지만 체감상 한 80번 정도의 거절 끝에 어떤 아버님이 우리 앞에 멈추셨다.
뒷자리엔 나무 자재들로 가득해서 불편할 텐데 태워드릴까요?
마음속으론 '트렁크여도 상관없어요.'를 외쳤다. 마침 시내 쪽 가신다면서 태워다 준다고 하셨다. 아버님은 산의 국립공원 계단을 설치하시는 분이라고 하셨다. 존경스러운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우리가 산을 타는 이유엔 길이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어떤 대단하신 분들이 길을 만드는 건지 궁금했는데 아버님처럼 멋지신 분들이 하구나 했다. 가는 길에 아버님은 어색하게 하지 않으려고 되려 말을 걸어주시는데 이번엔 내 친구가 조용히 울었다. 물어보지 않았다. 이 따뜻함은 말 안 해도 아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숙소에 도착을 하고 오늘의 따뜻함을 간직하려고 이야기를 나눈 후 행복하게 잠에 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희로애락 감정의 정점을 찍고 내려온 그 하루를. 나도 모르게 강해져 버린 내 마음을.
친구와 나는 지금도 힘든 일을 닥칠 때마다 외치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