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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침잠mania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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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현주 Jul 13. 2022

 Becoming 장학사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세상을 모두 잃은 자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나는 너무나 가난했다.


다시 도전할 전쟁에 내포된 죽음만이 나의 전부였다. 하찮은 인간인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새로운 시간만이 새로운 싸움을 싸워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바탕이었다. 따라서, 가장 먼저 내가 한 일은 나를 하얗게 지우는 것이었다.


알량하게 남아있던
내 모든 자존심을
지구 내핵까지 처박아버렸다.



실패를 초래한 원인을 샅샅이 분석해서, 모든 책임을 내게로 돌렸다. 아무리 쉬운 문제라도, 답안은 가장 빛나고 평범을 뛰어넘게 써야 했었다. 문제의 표면상 내용을 넘어, 본질적 의미를 통찰하는 최고의 답안을, 나의 모든 앎을 농축해서 완벽하고 아름답게 담아냈어야 했다. 시험지를 받아 든 순간 번뜩였던 나의 자만심이 나를 무참히 실패하도록 한 것이었다. 실패자인 나는 이제 사람의 영역을 넘어서는 노력을 통해 실력과 자세를 다시 재건해야 했다.      







그런 나에게 정상적인 의식주는 허락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버리고, 모든 숨에 절제를 불어넣었다. 숨 쉬는 모든 순간을 성찰과 공부로만 채웠다. 밑바닥에서 공부하는 자에게 귀걸이는 말도 안 되는 허영과 사치였다. 화장품, 원피스, 액세서리 따위를 모조리 창고에 집어넣고 가장 미천한 행색으로 일관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내 눈은 정책문건만 보았고, 내 귀는 그것을 녹음한 내 목소리만 들었다. 자면서도 공부했고, 깨어서도 공부했다. 오로지 학습하고 암기하고 반성하고 성찰했다.



300쪽이 넘는 논문을 매일 한편씩 정독해서 답안에 녹여냈고, 근사한 워딩 하나를 건지기 위해 두꺼운 단행본도 하루 만에 독파했다. 공부한 책들은 온 집안에 가득 쌓여만 갔다. 침대 가장자리까지 쌓아 올린 책 무더기를 피해 겨우 쪼그리고 새우잠을 잤다. 등을 펴고 반듯하게 누울 수 없었기에, 잠은 깊이 들지 못했고 두세 시간 만에 바로 깨어나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냥 나는 나이기를 포기했다. 그래야 고통이 덜했다.


내 처지의 참담함에 몰입하면
곧장 죽을 것만 같았기에,
살기 위해 오로지 공부 생각만 했다.


'공부하는 나'를 공부하는 메타인지만 가동했다. 어떤 난관도 헤치고 나갈 나만의 칼을 갈고 또 갈았다.    





결전의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콜택시를 불러 타고 빈속에 홍삼 진액 두 봉지를 목구멍에 때려 넣었다. 작년 첫 도전 때의 흥분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저 가슴이 웅장할 뿐이었다.



어떤 공격도 맞설 준비가 모두 끝났으므로,
내 인생을 가를 문제를 숙연히 기다렸다.


어떤 문제가 나오더라도 나는 맞출 것이었고, 단 한 명을 뽑더라도 내가 뽑힐 정도로 단단하게 중무장했다. 세상의 어떤 변수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강력한 핵무기를 보유한 채 전쟁터로 향했다.




언제나 상상했었다, 시험장의 공기를.
늘 생각했었다, 시험이 끝났을 때의 나를.


시험이 끝나는 그 시각, 나의 백골은 다 흩어지지 않을지, 내 몸이 모조리 다 부서져서 날아가지 않을지를 상상했다. 내 인생의 모든 시간은 그 순간에 집약되었다. 그 순간이 닥치면, 모든 것을 토해낸 나는 복도에 주저앉아 펑펑 울 것 같았다. 왜냐면 내게 허락된 모든 시간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지 않을 것 같은 미래, 너무나 두려운 미래, 언제나 숨 쉬던 미래가 현재가 되었고, 시험이 끝났다. 그렇게 두 번째 나의 도전이 장렬히 막을 내리고, 내 시간은 거기서 멈추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기차를 타고 언니네 집으로 내려갔다. 내 모든 것을 주어도 부족할 만큼, 너무나 사랑하는 조카 도은이가 나를 안아줬다. 

아기는 내 생명의 신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순수한 존재인 우리 아기를 보면, 절망감이 희망으로 소생했다. 도은이를 보러 가는 건, 무참한 고생을 한 내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아기 공주는 부엌에서 스타벅스 컵에 정수기 물을 받아서 내게 갖다 줬다. 도은이가 말했다.


“이모, 이것 봐. 컵에 이모가 그려져 있네? 이건 이모 컵이야, 이모 컵. ”


스타벅스 컵에는 사이렌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인어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딴 사이렌 얼굴이 나와 닮았다고 느꼈나 보다. 바다를 자유로이 유영하는 사이렌이 부러웠다. 내 심장에서는 계속 사이렌이 울렸다.








시험이 끝나고 발표일까지,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내가 있는 세상에서 나는 살지 못했다. 이승인지 저승인지, 피아를 식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오직 신의 뜻을 기다릴 뿐이었다. 발표 전날, 이미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퇴근 후, 억수로 내리는 비를 뚫고, 예술의 전당 챔버홀로 향했다.


이날 연주회는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의 ‘소음과 음향’이라는 ‘세상의 모든 소리 프로젝트’ 공연이었다. 혼미한 내 정신을 돌려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불협화음이었다. 첼리스트가 선보인 이 날의 연주는 또다시 재연하기란 절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선율은 너무나 괴이했지만, 신기하게도 무질서 속에서 질서가 느껴졌고, 효란했던 내 마음도 눌러주었다.


최종 발표 당일, 전날의 연주회 덕분에 영혼의 격앙된 흥분을 겨우 잠재우고 담담한 마음으로 학교에 출근했다. 머릿속에서 지난 세월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한없이 내려갔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사력으로 버티고 버티다 못해, 끝내 나를 내려놓고 싶을 땐 살려달라고 몸부림쳤고, 구해달라고 신께 빌었다. 온몸으로 부딪친 나는 산산조각이 났다. 어느 한순간도 절대 쉽지 않았다.


그냥 혼자서 꺽꺽대며 눈물이 흐르는 순간은
심장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고행의 대장정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대천명의 시간…….


이승도 저승도 아닌, 현세도 내세도 아닌,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죄의식이 항상 나를 지배했었다. 상실된 나의 정체성을 제발 찾고 싶었다. 내가 갈 곳이 교육청인지 한강물인지를 판결받는 기로에 서서, 나의 목숨이 달린 발표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내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음을,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음을 오직 신만은 아실 거라고 믿고 또 믿었다. 처절할 만큼 가여운 나를 부디 굽어살펴 주시기를 애원했다. 나를 구해주시면, 나를 살려주시면, 내가 세상을 구하겠다고, 간절하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기도했다.     






오전 내내 수업을 하였다. 아이들과 교실에 함께 있으니 그나마 마음이 든든했다. 분주하게 국어를 가르치다가, 쉬는 시간에 잠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업무 메신저 팝업을 알리는 주황색 불이 깜박였다. 왠지 모를 싸한 기분과 함께, 주변의 공기가 철근처럼 가라앉았다.


메시지를 여는 찰나가 영겁처럼 느껴졌다.


이웃 학교 교감 선생님께서 보낸 쪽지를 보자마자, 나는 교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부장님, 최종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


교장 선생님들과 본청 장학사님도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우리 여부장이 최연소 합격자네요, 대단해요. 축하합니다! ”





드디어
응답을 받았다.


내가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다. 순간 기쁘지 않았다. 감히 기쁠 수 없었다. 그저 너무나도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이젠 나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아, 너무나 감사했고 안도했다.



암담함, 참혹함, 비정함, 슬픔과 연민으로만 가득 찼었던
고통의 세상에서 탈출해,
 
이제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모두 다 느껴볼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 내 목숨과도 같았던 소중한 책들을 1톤 트럭에 실어 보내며, 온몸을 땀으로 눈물 펑펑 *






“우리 딸,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서 편히 좀 쉬어라. ”


아빠가 보내신 카톡 메시지를 보고 또 보았다. 두 눈이 뜨거워지고, 가슴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심장에서 쿵쿵 울려 퍼지면서, 니체의 글이 떠올랐다.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


기존의 자신을 죽이고 극복할 수 있을 때만이 새로운 자기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한강으로 갔다.      


강물을 바라본다.

물결이 잔잔하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렇게 자연 앞에서 사색하는 게 얼마 만인가. 가만히 침잠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너무도 감사하다.     


바람이 분다.

강 표면을 훑어서 물결을 일렁인 다음, 내게로 다가온다. 바람은 내 마음의 결도 살포시 어루만져 준다.

      

세상으로 나아간다.

앞으로 나는 분명 많이 아플 테고, 많이 슬플 테다. 그러나 이미 고통의 극한을 겪었기에, 좀 더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한강 물의 깊이를 가늠하며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눈을 감는다. 내 마음속 보이지 않는 내밀한 곳까지 닿기 위해 강바람을 깊이깊이 들이마신다.


내 마음 속 나를 찾는다.

내가 보인다. 여리고 순수한 내가 보인다. 내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어 준다. 마음껏 세상을 만나라고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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