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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Oct 21. 2021

비건이 쉽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변화는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얼마 전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간판에 분홍색 돼지가, 머리에 빨간색 리본을 하고,
노란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불판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 거예요.

저는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저도 고기 아주 좋아하는데요,
그래도 돼지에 대한 예의라는 게 있는 거 아닐까요?
 
설마 걔가 지 친구들 요리된 걸 들고,
맛있어요, 오세요! 요렇게 춤추면서 꼬시겠습니까, 불판 위에서?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이런 간판.
 
그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죠? 이런 인간 위주의 생각, 전 소름이 돋아요."

-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 '정인(임수정 씨)'의 대사



영화 속에 등장했던 문제의 그 간판. 단지 영화 속 얘기가 아니다. 이런 이미지는 도처에 널려있다.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에 나오는 대사다. 아무리 개봉한 지 10년이 다 되어간다지만, 분명히 봤던 영화인데도 저런 대사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생경하게 다가왔다.



영화를 처음 보던 그때와 달리 '비건(완전 채식주의자)'으로 2년 넘게 살고 있는 지금, 정인의 대사가 구구절절 마음에 와닿는다. 그 후로 영화를 다시 보지는 않았지만, 이 대사 덕분에 앞으로 적어도 영화의 제목만큼은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처절하게 실패한 나의 '채식 전도'
 

누군가 내게 비건이 된 계기를 물으면, 몇 가지 결정적인 사건이 나를 '단숨에' 변하게 했다고 대답하곤 한다. 2018년 첫 번째 회사에서 번아웃이 올 정도로 일을 하며 몸과 마음이 망가진 데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까지 뇌경색으로 쓰러지시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뒤로 내 무의식에는 '건강'에 대한 중요성이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그 후 운동, 식단, 명상 등 건강에 좋다는 것은 모두 공부하고 시도해 보기 시작했고, 여러 식단을 전전한 끝에 정착한 것이 바로 채식이었다. 채식으로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근거 자료가 넘쳤으며, 실제로 직접 먹었을 때 경험해본 어떤 식단보다도 컨디션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건강을 잃으면 다 소용없다는 말을 너무 일찍이 깨달았던 탓일까. 나는 그 깨달음을 주변에 널리 알리고 싶었다. 젊은 나이에 당연히 건강 관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던 또래 친구들이 '잔소리' 대상 1호가 되었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건강의 중요성과 채식의 효과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알리고 다녔다. 몇몇 친구들과 같이 하던 독서모임에서는 '비건'을 주제로 다룬 책을 제안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와 의견이 부딪히는 친구와 서로 언성을 높이며 논쟁하기도 했다.



결과는? 예상하는 대로다. 나의 비건 전도 활동으로 인해서 채식을 시작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설득에 지나친 욕심을 낸 나머지 비건을 홍보하는 이유로 내세우던 건강상의 이유뿐 아니라 살생의 최소화, 지구 환경 보호라는 다소 당위성을 띤 얘기까지 덧붙이자 사람들의 거부감만 더 높이고 있다는 것을 오래 걸리지 않아 깨달았다.



나는 나에게 일어난 변화를 마치 하나의 인과관계처럼 여기고 있었다. 건강에 대한 중요성을 자각했고, 충분한 자료 조사를 통해 채식이 건강하다고 판단했으며, 실제로 경험을 통해 그 효과를 스스로 검증했기에 채식을 하게 된 것이라 믿었다. 이를 잘 요약하여 알려주기만 하면 남들도 나처럼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오만이었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변화는 균열에서 시작된다


ⓒ Unsplash.com


약 10년 전에 본 영화에 나왔던 대사가 지금에서야 와닿는 것을 보면서 불현듯 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과거의 내가 채식을 하게 된 배경에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일상에서 종종 느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던 크고 작은 '미시감(평소 익숙했던 것들이 갑자기 생소하게 느껴지는 현상)'들이 쌓이고 쌓이기를 반복하다가 몇 번의 큰 사건들로 임계점을 넘기는 순간이 왔을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달라진 계기를 물으면 단지 기억나는 몇 가지 인상 깊었던 사건만을 떠올리고는 그것이 계기의 전부라고 믿었다.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 그리고 그 양상은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변화는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정보를 얻는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변화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이건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도 자신이 내린 많은 결정과 관련된 동기들을 명확하게 의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 역시 인생에서 내리는 중대한 선택들은 대부분 무작위로 이루어지며, 어떤 경위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알기란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영화를 처음 봤던 10년 전의 나는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을 정도로 고기를 사랑했으니 그 대사가 그리 와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괜한 방어기제가 발동해서 불쾌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마 그 대사를 듣고 나서 한동안은 고깃집 간판들이 영화를 보기 전과는 사뭇 다르게 보였으리라.



당시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그 대사는 내 일상에서 눈에 띄는 변화를 일으키진 않았지만, 무의식 한구석에 민들레 씨앗처럼 조용히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그런 씨앗이 많아지고 싹을 틔우면서 변화가 시작된 것 아닐까.



'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 또는 '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처음에는 싫어하거나 무관심했던 대상일지라도 반복적으로 노출이 될 경우 호감도가 증가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나의 변화 역시 살면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경험들에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변화는 굳건하던 일상에 생긴 작은 균열에서부터 시작된다. 누구나 일상 속에서 당연하게만 여기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하게 보이지 않는 순간이 있다. 그런 균열의 순간들이 모여 자신이 전부라 믿던 세상의 벽을 무너뜨린다.



이제는 누군가 내게 어떻게 비건이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미소를 띠며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살면서 경험한 모든 것들이 계기였다고. 그냥 나에게 일어났어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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