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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Sep 12. 2022

壬寅년 己酉월 첫 번째 기록

22.09.04(일) - 22.09.10(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9.05 (월)


(..)

여전히 침을 스스로에게 놓는 것은 무섭다. 날카로운 물질을 내 몸에 찔러 넣는 행위는 어딘가 두렵기도 하고 '침향'이라 하는 그 침의 자극이 썩 유쾌하지만도 않기에. 게다가 찌르는 동안 언제쯤 그 반응이 올지 모르는 데서 비롯되는 두려움도 한몫한다. 확실히 침을 나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남들에게도 놔주는 행위는 오행상 금(金) 기를 길러준다. 금기가 부족한 내게는 루티너리한 삶, 계획을 세우는 삶만큼이나 침술은 큰 도움이 되어주는 것 같다. 


(..)

통증은 통증이고, 나는 나다. 통증은 내가 아니다. 내가 경험하는, 그러니까 나를 통과해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내가 특정한 명칭을, 가령 '두통'이라는 특별한 칭호를 부여하고 그것이 마치 나의 일부인 양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에게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질병은 의외로 상당 부분 우리 마음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단순히 음식을 건강하게 먹지 않아서, 운동을 안 해서 걸리는 것만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야말로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할 생각에 익숙함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과 설렘이 내 안에서 공존하는 게 느껴진다.


(..)

나는 돈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달리 돈 말고 다른 방식으로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22.09.06 (화)


(..)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되듯, 사람도 세력을 이루면 청하던 기운이 탁해지고 마는 것일까? 집단이라는 존재는 확실히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합 그 이상임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람이 모이면 개개인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형태의 성향이 발현되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칭기즈칸도 '혼자 꾸는 꿈은 꿈으로 남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집단이 만들어 내는 에너지가 크다는 뜻이리라.


따라서 개인들이 모일 땐 신중해야 한다. 모임의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확고한 도덕, 철학적 신념이 집단을 튼튼하게 뒷받침해 줘야 한다. 그것은 구성원 개개인의 신념에 의존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집단의 리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윗물이 썩으면 아랫물은 볼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급한 일반화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가 그렇다.


오직 이상 현상만이 그 부패를 뒤엎을 수 있다. 태풍이 일어서 온 세상을 뒤집어 놓듯 아래 세력이 개혁을 주창하며 고인 물 세력에 항거하고 새로운 규칙을 선포하는 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면 다시 썩고 마는 것이 어찌 보면 인간이란 존재의 불가피한 한계점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가 정반합의 과정을 반복해서 겪고 있는 것이겠지.


(..)

조급함은 독이다. 결단을 빨리 내려야 한다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으나 신호탄은 단발적인 역할을 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계속 내면에서 떠나지 않고 남아있을 때 그것은 치명적인 독으로 변하고 만다.


(..)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고 자책하지만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고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이것은 알아차림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첫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무의식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이요, 둘째는 나 자신이 그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슴과 마음이 일치되어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나는 정말 그것을 원하는가? 그에 대해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대답을 하고 있다면 실수와 후회와 자책을 반복하는 삶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가슴과 머리가 하나 되어 원하는 것은 금방 나의 삶에 자리를 잡는다.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뜨거운 가슴이다.


(..)

시간과 정성을 들이면 밑 빠진 독에도 잠시나마 물이 차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구멍으로 새어나가는 물이 아니라 찰나에 불과하더라도 물이 차오르게 한 그 사람의 노력의 가치이다. 물이 새는 구멍은 보수를 하면 그만이다. 다만 나는 개개인이 노력을 기울이는 행위, 자신이 뜻하는 바에 정진하는 숭고함을 스스로가 폄하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인내의 고통은 쓰더라도 그 열매는 달콤한 법. 열매의 당도는 철저히 자신이 흘린 땀방울의 농도에 비례한다.




22.09.08 (목)


(..)

대부분의 사람들은(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자신이 받은 것의 가치보다도 자신이 받지 못한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렇기에 자신이 누리는 것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아니 실제보다도 더 줄여서 받아들이고, 자기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작은 것도 크게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 부풀리는 정도가 자신의 에고의 크기이다. '나를 똑바로 대접해 달란 말이야!'라고 세상에 외쳐대는 에고 말이다.


(..)

자기 몸과 마음을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어느 정도 돌볼 줄 아는 사람. 자기가 중요한 만큼 남도 소중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 피해나 손해가 가해의 권리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 내가 걷는 길의 길동무는 그런 사람들이면 좋겠다. 적어 놓고 보니 내가 지향하는 삶이다. 나는 그 지향점에 얼마나 가깝나? 내가 그 지점에 가까워질수록 나의 삶의 동반자들 또한 그렇게 바뀌어 나갈 것이다. 유유상종인 법이니까. 


결국 언제나 방향은 나로 귀결되어야 한다.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사람이 마음에 안 들 때. 외부의 조건 그 자체가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이 그 조건을 안 좋게 받아들이는지를 살필 줄 아는 지혜를 지녀야 한다. 깨달음과 무의식 정화의 과정, 성숙과 성장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아주 지난하고 긴 여정에 다름 아니니깐.


(..)

주는 기쁨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평생을 다 살아도 인생을 제대로 살았다고 보기 힘들다. 그는 필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니. 잊지 말도록 하자. 이타심의 크기는 내 안의 이기심의 크기만큼 커져야 한다는 것을. 내가 소중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남도 소중한 존재임을.




22.09.09 (금)


(..)

아침에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A4용지 3쪽을 가득 채운다는 게 시간이 제법 지난 지금도 여전히 부담스럽긴 한가 보다. 사실 이것이 매번 부담으로 다가온다기보다는 오늘처럼 어느 날 새삼스레 그런 감정이 올라오곤 한다. 그럴 때 보면 어김없이 눈앞의 과정보다 최종 결과에만 주의가 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

소위 '도사'라고 일컬어지는 존재들이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는 이토록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의 개방과 관련된 분야에 쉬이 관심을 빼앗기곤 한다. 모르긴 몰라도 전생에 한 번쯤은 저 멀리 아틀란티스 대륙에 사는 사람이었거나, 이름을 날렸던 도사였거나 큰 스님 같은 사람으로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결코 죽음과 같은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순 없다. 그 앞에서는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는 끝내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지고지순하고 당연한 그 진리를, 차마 가슴으로까지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살던 필부필부들에게 죽음이라는 존재는 마지막 찰나와 같은 시간일지라도 그것을 온 마음을 다해서 절감하도록 만든다. 진정한 깨달음은 오직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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