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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Nov 15. 2022

壬寅년 辛亥월 두 번째 기록

22.11.06(일) - 22.11.12(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11.07 (월)


(..)

가을이 수확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저장과 준비의 계절이다. 계묘년의 입춘이 오기까지 나는 이제 슬슬 한 해를 갈무리 지을 준비를 해야 한다. 올 한 해의 나는 어떤 시간들을 보냈나? 무엇을 배웠고, 누구와 시간을 보냈나? 내가 보낸 시간들 중 얼마만큼을 좋아하는 일에 투자했고, 얼마만큼을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투자했나?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다른 누구도 아닌 온전한 나 자신으로서 존재했나?


(..)

그것이 무엇이든 감정은 내부에 고여있도록 하면 안 된다. 감정은 물과 같아서 흐르도록 하지 않으면 썩고야 만다. 감정이 잘 흐르도록 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현재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자세히 살필 줄 알아야 하며, 그러한 감정을 여러 수단을 활용해서 표현해 내어 흘려보낼 줄 알아야 한다.


가슴에 감정이라는 물결이 넘실거리며 흐르는 나름의 길이 잡혀있을 때 건강하고 바른 결의 마음이 자리 잡을 수 있다.


(..)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지금의 내 육신도, 꿈속의 또 다른 나도 아닌 그 모든 것을 경험하는 자, 관찰하는 자라는 것을 상정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라야 현재 우리 각자가 탑승해 있는 육신의 시선에만 갇히지 않은 채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래야 삶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넋을 잃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

20대들 사이에 있었다면 나는 아저씨라는 놀림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4-50대들 사이에 있으니 젊음이 부럽다는 소리를 듣는다. 무엇이 진실인가? 어느 쪽도 진실이 아니다. 진실을 두고 사람들이 붙이는 라벨에 넋을 잃어선 안 된다. 진실은 단 하나. 내가 태어난 지 나이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뿐이다. 거기에 나만의 라벨링을 붙일 때 그것은 온전히 나만의 진실이 된다.


(..)

안 되는 이유를 찾기보다 그것을 스스로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라. 안 될 이유부터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이 자신이 선택해야 할 길이 아닐 수도 있다. 진짜 자신의 길이라면 그쪽으로 너무나도 걸어가고 싶은 나머지 누가 곁에서 안 될 이유를 들려줘도 어떻게든 되게 만들 방법을 궁리하게 마련이다.




22.11.08 (화)


(..)

기계적으로 그 스케줄에 나를 욱여넣기보다는 내 몸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아차리는 법을 익혀야 한다.


(..)

다양한 것을 건드리는 방식이 삶의 향방을 갈라 놓는다. 주된 중심축도 없이 박쥐처럼, 철새처럼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며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리스크가 다소 크다. 대신 무엇이 자기에게 잘 맞는지를 더 빠르게 알 수는 있다.


반면에 핵심 무기를 갖춘 채 그 외에도 다양한 무기들을 익혀보는 것은 오히려 좋다. 비슷한 것들끼리는 서로 시너지가 나기 때문에 결국 큰 관점에서는 개별적인 나무들이 아니라 하나의 숲을 이룬 듯 보이게 되는 것일 테니.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정신적 영역에서는 후자의 길을 걷고 있고, 물질적 영역에서는 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이 둘이 어딘가 막힌 듯 이렇게 따로 놀고 있는 것은 금기(金氣)가 약한 탓이리라. 이는 다시 말하면, 금기를 기른다면 두 흐름이 자연스레 통하여 따로 놀던 것들이 하나로 통하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잘 나갈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변함없이 그렇게 매일을 군자처럼 겸손하게 살아갈 때 자연스레 금기가 길러질 것이다.


(..)

삶이라는 조각가는 여러 가지 사건을 겪게 함으로써 나라는 원석을 하나의 유니크한 조각품으로 탈바꿈 시킨다. 삶이란 원석에서 조각으로 변모해 가는 빛나는 과정의 연속인 셈이다. 스스로가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뿌리 깊은 자존감은 바로 이와 같이 삶을 인식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

방황해도 좋다. 가슴속 북극성을 잃지만 않는다면. 마음속의 그 방향성만 간직하고 있다면 모든 것이 절로 해결될 것이다. 자신의 진심과 시간을 쏟아붓되 결과는 하늘에 맡기라.




22.11.11 (금)


(..)

"일상에 치이다 보니..."라는 관용적인 표현을 이제 그만 좀 써야겠단 생각이 든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일상에 치여 잊고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거기에 쏟은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적다는 뜻이다. 


(..)

논조의 날카로움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자기 생각의 옳음에 대한 강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동시에 상대의 생각이 자신의 그것이 비해 더 틀린 것이라는 강력한 확신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정말 확신하기 때문일까? 오히려 스스로는 확신을 온전히 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확신에 차있기 때문이 아니라, 확신에 차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옳지 않다고 믿는 다른 생각들에 의해 나의 생각이 뒤집히고 반박당할 까봐 그런 것이다. 


이건 남을 까내리며 우월감을 느끼는 방구석 악플러들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

대상에 대한 어필을 할 때 그것이 얼마나 좋은지 칭찬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존의 다른 비슷한 물건이 얼마나 불편함을 유발하는지 비판하는 어조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

나는 전자의 방식에서 더 그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난다. 무언가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감탄할 때 그 사람에게서는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반면에 무엇인가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게서 역시 특유의 무겁고 불편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너지의 파장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에너지에 대한 나의 느낌이지, 말의 내용이 지닌 진위 여부가 아니다.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것에 필요한 것이 논리적 추론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언가에 진심으로 꽂혀있는 사람과 무엇인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쪽 어느 쪽이든 간에 거기에서 발산하는 감정에 얼마나 진정성이 느껴지느냐에 따라 그 말의 진위 여부를 판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논리가 아닌 직관에 의한 앎. 논리 이전부터 존재했을 영적인 능력은 우리 안에 지금도 여전히 가능성의 씨앗으로 내재되어 있다.


(..)

나는 기왕이면 순수하게 즐기는 자에게서 방출되는 에너지를 지닌 사람이고 싶다. 그런 기운을 품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를 현란한 언변과 논리적이고 개량화된 수치들로 설득할 필요가 없다. 무언가에 매료되어 그 자체로 순수하게 즐길 줄 아는 모습 자체가 요즘 세상에서 보기 힘든 진귀한 장면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설득의 도구가 된다.


그런 에너지는 마치 태양볕과도 같아서 주변을 비추고 따스하게 감싼다. 겨울날 화롯불처럼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모이게 만든다. 그것이 그 사람의 고유한 색채요 빛깔이다. 누구나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드러낼 때, 세상에 없던 따스한 에너지를 발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는 구태여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비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따금씩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아직 나 자신이 나만의 고유한 색채를 찾지 못했으며 그것에 완전히 매료되지 못한 상태라는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

우리는 끝없이 결핍을 찾아 그것을 메꾸려고 안달이다. 가진 것, 얻어낸 것을 즐기는 것은 한순간일 뿐, 그것은 어느 순간 창고 속 전리품의 신세가 되고 만다. 또다시 다음 정복 대상을 찾는 여정에 몸을 맡기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도 해당되는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 그것이 인류 역사의 발전을 가져온 측면도 결코 부정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인간은 현재를 즐기는 법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자연 만물에 적용되는 기본 법칙 중 하나가 순환성의 원리인데, 자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에도 인간만큼은 예외적으로 순환성이 없는 우상향 그래프를 만들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가 보다. 성장을 위한 성장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성장이며, 왜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 의문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신은 죽었다던 니체의 말을 빌려 '호모 사피엔스는 죽었다.'라는 말을 혼자 나지막이 끄적여 본다.


물질적 성장 그래프는 더 이상 우상향의 추세를 유지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대신 다른 영역에서 그런 추세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국에는 다시 물질적 발전의 가능성의 한계치를 대폭 높여주기도 할 것이다. 본디 물질과 정신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22.11.12 (토)


(..)

아침형 인간이 되려거든, 몸과 마음이 모두 아침을 즐기며 만끽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녁의 화려한 생활보다 아침의 소박한 하루에서  더 큰 만족감을 즐겨야 할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는 것들이 제각각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시너지를 이룬다는 것이다. 누가 보면 활쏘기와 피아노, 역학 공부, 침뜸 공부가 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되물을 지도 모른다.


(..)

그러한 여러 가지 치렁치렁한 구슬들을 한 데로 엮어줄 끈이 존재해야 이것들이 커다란 그림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각 항목들 간의 유사성을 찾아내어 그것을 공통의 끈으로 보는 관점은 숲을 보기보다는 나무를 보는 것이다. 숲을 보려면 그 사람의 가치관, 삶의 기조가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나의 경우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지향한다. 자유라는 키워드에서 좁은 분야만을 송곳처럼 날카롭게 파고드는 대신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 것임을 유추할 수 있고, 주체성이라는 키워드에서 그 선택을 내려가는 모습이 타인이나 시대의 주류에 수동적으로 편승하는 양상이 아닐 것임을 알 수 있다.


(..)

자기 수양의 길에는 끝이 없다. 끝이 없으니 지속성이 중요하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유혹의 순간들, 혹은 그런 순간들이 꽤나 길게 이어지는 특정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누군가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슬럼프 같은 게 없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각색한 게 아니라 그 자신만의 정의로 새롭게 옷을 입힌 것에 불과하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평소와는 다른 날, 혹은 그런 시기를 겪게 될 수밖에 없다. 누구는 그것을 힘든 시기, 슬럼프, 정체기라고 표현을 하는 반면에 다른 누구는 잠시 숨을 고르는 시기, 재정비의 시기, 정신적 산책의 시기, 딴짓을 할 권리를 얻은 시기 등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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