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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Feb 07. 2023

癸卯년 甲寅월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2월 1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5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1.30 (월)


(..)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는 포인트는 어쩌면 그가 지향하고 있는, 추구하고 있는 상태일 확률이 높다. 더군다나 그가 질문을 통해 그에 대해 적극적으로 탐문(?) 해 온다면 말이다.

(..)

전자책은 오늘 내일 안에 출시하기는 요원해 보인다. 조금만 더 다듬어서 2월에는 내볼 수 있도록 하자.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하지 마. 가뜩이나 2월은 기간도 더 짧은데 주말마다 일정이 빼곡히 차 있어서 너무나도 금세 지나가 버릴 테니.

(..)

요즘 한 번씩 들었던 생각인데, 나는 걸을 때 종아리 앞 근육, 그중에서도 정강이 우측면에 붙은 근육이 뻐근해짐을 종종 느끼곤 한다. 특별한 외상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통증은 인체 내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단순히 자세가 좋지 않아 생기는 신체 불균형으로 인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그럴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의외로 우리 몸은 겉과 속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이것은 어쩌면 내부 장기의 불균형으로 인해 생기는 작용인지도 모른다. 

(..)

기후 위기.. 이것이 만일 거짓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무엇의 진실 여부를 파악함에 있어 도움이 되는 말, 혹은 표현 하나는 ‘그래서 누가 이득을 보는가?’이다. 라틴어로 뭐라고 했었는데.. 아, 그래 ‘Cui Bono?’ 이거다! 햐.. 기억이 안 나다가 시냅스가 오래간만에 휴면의 상태에서 회복이라도 됐는지 순간적으로 서서히 기억이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

믿음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물론 그 믿음은 내가 평소에 쌓아 올린 여러 언행들의 결과적인 업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인에 따라 믿음이 생기는데 필요한 그런 증거들의 양이 다르고, 한 번 생긴 믿음이 지속되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란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3.01.31 (화)


(..)

나는 습관처럼 그것이 삶이라는 넓은 범위로 확장되었을 때 어떤 의미가 있을지 상상해 보려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어떻게 보면 우아하고 고매한 사고 패턴이고, 어떻게 보면 고질병이다. 일상을, 삶 속에서 마주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고려하지 않고 내 관점에서의 라벨링을 하는 하고야 마는 그런 습관.

인간의 뇌는 후두엽에 있는 1차 시각령에서 눈으로 본 정보를 인지한다고 한다. 망막에 상이 맺히는 1차적인 순간을 여기에서 관장한다. 그리고 그 정보는 전두엽으로 이동, 정확히는 전두엽이 개입되면서 주관적(그러나 본인 스스로는 상식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인 기준에 의한 해석이 덧붙여진다. 우리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수도 없이 판단에 판단을 거듭하게끔 설계가 된 존재인 셈이다.

(..)

그것이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는 선입관과 편견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대개 편견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말이다. 사실 자연에는, 넓은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는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없이 그저 현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지구 입장에서 자기 몸이 너무 뜨거워서 찬물을 좀 끼얹거나 얼음방에 들어간다면 지구 거주민인 인간 입장에서는 재앙이겠지만 지구에게는 휴식이 되는 것처럼.

(..)

자연에는 선도 악도, 도덕도 윤리도 없다. 살아남은 존재가 강자이고 적자이다. 그런 논리로 본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적자였을 따름이지 가장 선한 자는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아틀란티스 문명이 실로 존재했다면(나는 100% 허무맹랑한 소리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가 미처 발견치 못한 고대 문명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도덕과 선이라는 관점에서는 훨씬 더 뛰어났을 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물질이 최우선시 되는 시기가 있다면,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정신적 가치가 훨씬 중시되던 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과거를 보면 저 땐 어떻게 다 저러고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들듯, 지금 우리가 이룩한 것들, 옳다고 믿는 다양한 가치들이 후손들의 비웃음을 살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래된 지혜,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전해져 내려오는 유구한 가치들은 그들에게도 역시 가치를 인정받고 그다음 후대로까지 전해져 내려갈 것이다. 무엇이 변하고 퇴색될 가치이고 무엇이 변하지 않는 가치인지 알아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는 각자의 삶에서 자신에게 알맞은 비율로 그러한 가치를 좇는 삶을 살아야 한다.

(..)

어디서든 원하는 정보를 찾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인터넷이 도리어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기 위해 필요한 정보만을 찾아보는 확증편향적 측면을 강화하여 스스로가 고립을 자처하는 사회 풍조를 만들어냈다면, sns의 발달은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어 사회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했다는 측면에서 표현의 자유의 황금기를 일으킨 동시에 어떻게든 대중의 관심만 끌어오면 돈이 된다는 이기심에 주의력을 빼앗기만 하고 자극과 거짓이 난무하는 질 낮은 콘텐츠가 범람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에 살게 됐다. 사회는 파편화되었고, 양극화되었다. 이제는 감동적인 글을 봐도 가짜 뉴스가 아닌지 의심부터 하고 보는 웃지 못할 풍조가 형성됐다. 원시 사회가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단순하고 넓게 네 편 내 편을 갈랐다면, 현대사회는 같은 국가 안에서, 같은 도시 안에서, 같은 집단 내에서, 심지어 1:1 관계에서, 이제는 대화 주제별로 네 편 내 편이 갈린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기도 한다. 단지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졌다거나 서로 다른 정당을 지지한다거나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라이프 스타일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심지어 그 각자는 그저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갈 평범한 시민일 뿐인데도. 얼마나 우습고 안타까운가. 

솔직히 한심하다고까지 생각이 들었으나 과연 나는 이런 풍조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100% 그렇다고 확신을 갖고 답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말을 아꼈다. 다만 늘 그러한 어리석음을 경계해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할 뿐이다.

비판이라는 탈을 쓰고 상대방을 비방하기 바쁜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이 소위 말해 분탕질의 주범이다. 그들이 사회를 쩍쩍 갈라 파편화시키는 생태계 교란종이다. 그런 시류에 쉽게 동조하지 않으려면 자기만의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

봉사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전에 봤던 어떤 사주 유튜버 분이 기본 상담료보다 훨씬 더 저렴한, 무료에 가까운 가격에 상담을 열어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은 것이다. 의도가 선하면 그것의 확장은 세상에도 이롭다. 나에게 좋은 것이 세상에도 이로울 때 이것이 이기심이 본능인 인간이 취해야 할 올바른, 건전한 이기심이 되는 것 아닐까? 이타심은 이기심의 일종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이타심이 될 수 없다. 이 문장을 유념해야겠다.

본능을 억누르기만 해서는 장기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가 없다. 그 본능을 이로운 방향으로 풀어내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두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 아닐까. 물론 당연히 이는 방향성에, 이론에 불과한 소리다. 무언가가 옳다고 해서 모두가 그리로 가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 그것이 생태계가 존재해 온 균형의 원리이리라.



23.02.01 (수)


(..)

아쉽게도 요즘의 달력은 절기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농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관심이 없을 땐 나 역시 몰랐지만 관심을 갖게 되니 비로소 사라져가는 것들이 보인다. 한때는 당연했지만 어느새 시대가 변하여 당연하던 쓰임새가 당연하지 않게 되는 것이 비단 절기뿐이랴. BTS의 노래 중 <작은 것들을 위한 시>가 있는 것처럼 나도 <사라져 가는 것들을 위한 시>를 하나 써봐야 하겠다.

<사라져 가는 것을 위한 시>

그땐 몰랐네, 그대 마음 변할 줄을 (첫 줄부터 노래 가사 표절하기 있기냐?)

세상 모든 이가 날 기억하던 때

나는 마치 하늘 위 떠 있는 태양이라네

구석구석 두루 내 빛과 온기를 나눠주며

나의 존재를 모두에게 알렸다네

어느덧 때는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시간

땅거미가 지듯 나라는 존재 역시 사라져가네

모두가 날 기억하던 밝은 하늘은 이제 없네

그러나 빛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누군가는 다시 아침을 기다리듯

변함없이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기다릴 누군가는

분명 존재할 것을

영원한 기억됨도 없지만

영원한 잊혀짐도 없음을

삶은 그저 계속해서 펼쳐질 뿐

그 사실이 나를 위로하네

자, 써보니 어떤가. 뭔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가도 뭔가가 써진다. 모닝 페이지는 꽉 채운 줄글일 필요는 없다. 형식 같은 것은 없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매번 빡빡하게 온 종이를 다 채울 필요는 없다고. 자신의 목소리가 가장 잘 터져 나오는 형식을 그때그때 취하면 그만이다. 어딘가에 갇히면, 자유도가 떨어지면, 흥미와 지속력도 그만큼 떨어진다. 

무엇이 나를 춤추게 하는가? 매일을 춤사위를 벌일 순 없겠지만 춤을 추고 싶을 땐 춤을 추라. 시를 쓰고 싶을 땐 시를 쓰고.

(..)

어쩌면 시야 말로 요즘같이 긴 텍스트를 읽기 힘들어하는 시대에 걸맞은 형식이 아닐까? 다만 그 농축도가 너무 진하면 아무리 소량이어도 맛보기가 부담스럽듯이 적당한 함축성을 가진 채로. 일례로 예전에 한창 인기였던 하상욱 시인을 들 수 있겠다.

혹자는 그것도 시냐며 비아냥거리겠지만, 그것은 문학이라는 도구에 쓸데없는 권위와 진입장벽을 높이기 위한 처사로 보이는 것은 부족한 나의 기분 탓일 뿐일까.

물론 특정한 것에 광적으로 집착하면 그것도 하나의 예술이 된다. 엄격한 형식 안에서 스스로를 제한하면서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은 분명하다.

(..)

그런 제약을 극복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가벼워 보이거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것은 시라고 보지 않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은 맞지만, 전부 맞는 말도 아니다. 누군가 3초 만에 시를 한 편 썼다고 한들, 그 시에 담긴 인사이트를 얻기까지 고작 3초가 걸렸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시 한편의 길이가 그 안에 담긴 시인의 깨달음의 과정에 수반된 ‘인생 비용’을 결정짓진 않는다.

(..)

내가 관심을 갖는 대상이 생기면 정말 그와 관련된 것들이 더 많이 보이게 된다. 인간의 심리적인 기제가 그렇게 작동하는 측면도 있고, 온라인의 알고리즘도 그에 일조한다. 그러나 실제로, 마치 알고리즘이 오프라인 세상에도 존재하듯이 그와 관련된 일이나 자신이 필요로 했던 그것이 기대하지도 않던 사람이나 상황으로부터 주어지는 경험의 횟수도 확실히 늘어난다.

나의 요즘의 관심사는 명리와 타로. 그리고 그밖에 정신적인 세계를 유영하도록 해주는 모든 것들. 세상이 돌아가는 섭리 전반에 관심이 있다. 동시에 현실이라는 지상 세계에 발 딛고 살아가는 데 있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돈,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줄 시스템에 대한 관심도 생겨나고 있다.

사실 예전부터 이미 있던 것들이 계속해서 버전업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어떻게 하면 ‘일단 나만 잘 살면 돼!’라는 마인드가 아니라 세상에 이로운 행위를 하고 그 결과로 자연스레 돈을 벌 수 있을까. 그런 가치에 대한 추구와 시스템적 사고, 자동화에 대한 지향 사이에는 상충 지점은 없는가.

고민을 하되 너무 천착하지는 말자. 화두는 던지고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이지 지나치게 매달리라고 존재하는 게 아니다. 품고 있다 보면 그것은 어느새 삶의 기반이 되고 세상을 경험하는 밑바탕이 된다.

(..)

집에 있다면 출퇴근하는 시간마저 아껴서 집중하는 데 쏟을 것 같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출근처가 필요하다.

(..)

필체를 교정하면 성격도 달라질까?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은 게 현재 나의 가설이다. 필체는 성격보다는 아니겠으나, 그래도 평생을 함께 해오던 습관이기에 바꾸는 게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정신적인 측면 또한 어느 정도는 바뀐다는 뜻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그러거나 말거나 각자의 위치에서 자유로운 창작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적극 장려되어야 한다. 모두가 창작을 업으로 삼을 필요는 없지만, 모두가 창작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23.02.02 (목)


(..)

몸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은 하루를 여는 중요한 의식이다. 게다가 밤에 잠들기 전에는 가급적 청결한 상태로 몸을 만들고 취침에 들 수 있어야 한다.

(..)

물을 아끼겠다, 혹은 지나친 샴푸는 두피에 해롭다와 같은 말은 됐다. 솔직히 말해 그건 구실에 불과하고 진짜 이유는 그냥 귀찮은 거잖아. 스스로가 게으름, 특히 나를 돌보지 않는 게으름, 몸뿐만 아니라 주변 생활 환경을 대충 다루려는 이런 충동을 억제하도록 각별히 신경 쓰자.

(..)

속 편하게 큰 병원에 가면 될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그곳 나름의 고충에 빠진다. 하나. 확장 및 인테리어 비용의 회수를 위해 열심히 광고를 때리는 곳이라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둘째. 무슨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 마냥 사람들이 몰려서 차례로 검사를 받고, 그 거대한 군중에 압도된 탓일까, 아니면 원래 그러한 것일까 영혼이 없고 친절함은 자취를 감춰버린 의사 및 간호사에게서 지금 이 현장이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는 곳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인간성이 상실될 만큼의 규모와 속도를 갖춘 곳은 아무래고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23.02.03 (금)

(..)

인간은 결국 자신의 자존심에 목을 매게 된다. 그것이 훼손되지 않는 방식으로 여러 심리적 반응을 보인다. 누구나 저마다의 유발 기제, 즉 발작 버튼이 있다. 정말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 싶은 방식에서부터, 자신의 본 목적은 교묘히 감춘 채 예의를 비롯한 각종 규범 혹은 당위성, 또는 명분을 앞세워 본인의 자의식을 보호하거나 부풀리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여러 다른 얼굴들을 하고는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정말 남을 위한 목적을 가진 행동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특히나 감정까지 격해지는 것은 십중팔구 개인의 자아와 관련된 심리 기제의 발동에 다름 아니다. 

(..)

나는 귀찮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다 보니 나를 공격하는 그들에게 맞저항을 했다. 꿈에서 깨고 보니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까. ‘외적 존재’가 위협적인 존재가 맞다는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한 그 대상의 공격성을 어떻게든 끌어올리려는 전략. 덫이다. 선동의 근거를 뽑아내기 위한 전형적인 함정. 꿈속의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쳐댔다. 

‘제발 나를 좀 가만히 내버려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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