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소리란 무엇일까. 그것을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오랜, 깊은, 자기와의 대화를 시도해 봤을까. 소위 '내면 아이'라고 하는 존재는 자신이 받은 상처의 깊이만큼이나 깊숙한 곳에 숨어있다. 그 장벽을 넘어 거기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개인마다 시간차가 존재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찾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나도 곧바로 떠오르는 말이 없다. 어쩌면 나도 지금껏 변죽만 울려왔으면서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자 내 안에서 '일체감'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과 마음과 행동이 대체로 하나가 된 듯한 느낌 또는 그런 상태. 내면의 소리를 듣고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소리의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정서적, 존재론적 안정감을 주느냐가 관건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확신을 억지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아닌 그저 행동하기만 하면 되는 것. 움직이기 시작하는 데까지 살짝 스스로를 떠밀어 줄 수 있게 하는 작은 용기만 갖추면 되는 그런 상태.
문득 모든 게, 내가 믿고 헌신하는 가치관들이 전부 허상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나를 맡겨본다.
LH 순살 아파트보다도 무서운 건 인간의 존재론적 붕괴다. 부처의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말조차 허상이라면?
유튜브나 SNS상에서 보이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겐 언제나 조작과 거짓의 가능성이 존재하듯 그것은 시대를 훨씬 앞서 존재해서 그 진위를 실제로 파악하기 힘든 과거의, 역사 속 인물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종교적 위인들, 아니 그보다도 훨씬 이전에 존재하던 고대의 샤먼들까지.
인간사에 종교로 대표되는 '정신적 집결지'를 만들어 인간을 모으는 방식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그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만, 그리고 깊이만을 달리할 뿐 존재해 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인간은 허상을 믿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것이 허상인지 아닌지는 사실 구태여 따져볼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게 나를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자신을 살아있게 만들고 움직이게 만들고 무언가에 몰입하고 정진하게 만들어 줄, 궁극적으로, 아니 근본적으로 즐겁고 행복하게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그 '무언가'라는 대상을 찾고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취하기로 결정하고 선택하기만 하면 될 문제인지도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