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Oct 02. 2023

癸卯년 辛酉월 네 번째 기록

[주간단남] 9월 4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09.25 (월)


(..)

약간 피곤함은 남아있지만 모닝 페이지를 통 안 써서일까? 아니면 연이은 출근과 늦잠으로 나만의 온전한 사색의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일까? 몸이 아직 남은 졸음기에 순응하는 대신, 습관처럼 자리에 앉아 모닝 페이지를 쓰게 됐다.


그러고 보니 침뜸 관련 카페도 하나 찾아서 가입을 해둬야겠다. 여름에 소홀했던 뜸 뜨기와 침뜸 공부도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다시 해보자. 아예 하지 않고 놓아버리는 것과, 그 끈을 놓지 않고 유지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차이는 시간의 흐름이 이자처럼 쌓여갈수록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 내게 된다.


(..)

부모로부터 정신적 독립이 되는 게 경제적 독립보다도 더 중요하다. 부모에게 경제적 독립을 못했을지언정 정신적 독립만큼은 먼저 하는 것이 건강한 정신의 성인으로 오롯이 성장하는 첫 발걸음이 된다. 누구나 상처, 결핍 하나씩은 달고 사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고 해서 자신의 삶 전반을, 상당 부분을 좌우할 만큼 부모가 남긴 잔상이 크고 넓고도 짙다면, 어떻게 주체적인 삶이 가능하겠는가.


옛 선현들이 말씀하신 '효'는 현대사회에 와서 멋대로 아전인수되고 있다. 자식의 앞날은 부모가 감놔라 배 놔라 하듯이 정할 수 있고, 거기에 마땅히 따르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하는 것은 효의 왜곡된 해석이다. 그것은 자식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컨트롤하려는 부모의 삐뚤어진 욕구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동양의 전통에서 말하는 효란, 자식 된 입장에서 부모가 원하는 길을 가는 것은 맞다. 단,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바로 부모가 스스로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그들 자신이 인의예지신이라는 덕을 함양한 '올바른'사람이 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옳음을 지향하고 자식에게도 그것을 가르쳐 스스로 주체적으로 사고하여 성숙하는 태도를 길러주는 것이 부모 된 도리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자식들은 마땅히 부모의 뜻을, 정확히는 부모가 전달하는 그 '옳음'의 가치를 이어나가게 되고, 그것이 바로 진정한 효이리라. 그런 대전제가 성립이 될 때 그 나머지가 자연스레 뒤따르는 게 효가 자아내야 할 올바른 진풍경일 것이다.


부모가 제 도리를 다하면 자식은 절로 올바르게 된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프로그램을 보며 사연 속 아이들을 욕하는 자들은 어리석다. 그것을 만들어 낸 원인은 부모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를 욕하는 자들 또한 어리석기는 매한가지다. 그렇게 될 수 있게 만든 사회적, 환경적 맥락도 있었을 테고, 그중엔 당연히 그 부모의 부모인 조부모가 존재한다.


물론 개인의 탓도 무시할 순 없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면 그렇게 남의 일에 쉽게 욕하는 자들은 결코 그 모든 가능성과 구조적 한계 등을 찬찬히 검토해 보고 내린 결론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무책임한 욕에 담긴 생각의 깊이는 가뭄이 든 논에 고인 물의 깊이보다도 얕으며, 그 무게는 신생아의 머리카락보다도 가볍다.


(..)

개인을 보려거든 시대를 보려 하고, 시대를 볼 땐 그 속의 개인을 보려고 해야 한다. 언제나 보이는 것에 시선을 빼앗겨선 안 된다. 내 삶에서 펼쳐지는 사건 사고 자체에 주의를 빼앗겨 그것과 싸워서도 안 된다. 바라봐야 할 것은 내면이다. 바깥이 시끄러울 땐 내면을 보고, 내면이 시끄러울 땐 다시 바깥을 보자. 의식을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일 뿐, 그 의식의 초점은 언제나 현재, 바로 매 순간에 둬야만 한다.




23.09.28 (목)


(..)

우리 가족은 언제 봐도 그저 편안하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의 상호 간의 이해와 내려놓음 그리고 존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람에 따라 모두가 원할 '행복'이라는 가치를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좇는 것이 결국 인생인 것을 서로가 이해하는 것. 그것이 상호 간에 필요한 조화와 존중의 정신이 되겠다.


상대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하지는 않더라도, 내심 상대가 자신 쪽으로 언젠간 바뀔 거라 기대하며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은 존중이 아니라 강요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언어적 폭력이나 물리적 폭력이나 똑같이 폭력이듯이 말이다.


(..)

어디서 들은 그 문장이 말하듯, 나 자신이 내면을 건강하고 조화롭게 가꾸어 나가면 그 에너지에 맞지 않은 사람과 사건들은 모두 떨어져 나간다. 결국 잔소리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바꿔야 할 것은 그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내는 스스로의 내면이다. 이것은 언제나,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할 각자 삶의 지침이 되어야만 한다.




23.09.29 (금)


(..)

눈이 일찍 떠지고 옆을 보니 자리가 비어있다. 어딜 가셨을까. 괜히 약 5년 전 추석의 기억이 떠올라 불안이 엄습한다. 2층에서 주무시는데도 복도에 전등을 꺼두고 잔 배려심 없는 나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중간에 일어나서 내려가실 때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혹시나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진 않으셨을까 걱정이다. 어머니의 위치를 확인코자 플래시를 켜고 계단을 내려가면서야 비로소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스스로를 반성했다.


(..)

삼촌과 아버지의 입을 빌려서까지 세상이 내게 일러주려 했던 것, 그것은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움직여 보라는 이야기였다. 처음엔 '당신이나 잘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쓸데없는 내 자존심이 만들어낸 방어기제임을 알아차렸다. 언제나 껍데기가 아닌 그 안에 담긴 상대의 의중과 그 마음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것이 오히려 세상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23.10.01 (일)


(..)

연휴 동안 배 터지게 먹느라 고생한 나의 위장을 위해 어제 점심은 단식을, 저녁은 과일식을 하며 몸에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엔 며칠간 계속된 알코올 섭취로 인해 피로해졌을 간을 위해 태충에 침을 놓고 있다. 물론 부회혈인 중완에도 함께.


(..)

뭔가 질주해야 할 것 같은 에너지가 움트는데 무언가에 가로막힌 기분이 든다. 주변인들의 경험담을 통해 자신감을 얻는 게 아니라, 가능성만을 본 뒤에 '나도 하기만 하면 할 수 있겠네'와 같은 생각만을 하며 곧바로 뛰어들지를 않는다. 


변죽만 울리다간 허송세월하기 십상이다. 누구 말마따나 가고자 하는 길이 정해지고 들고 갈 장비가 정해졌으면 곧장 걸어나가야 한다. 그리고 걷는 행동 그 자체만큼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뒤나 옆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 것이다. 


앞만 보며 경주마처럼 달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본인의 타고난 성향에 맞게끔 하면 될 일이다. 다만 주변을 구경 삼아 둘러보면서 그저 내 주변에 존재하는 하나의 풍경들이라 생각하지 않고 비교의 대상으로 삼게 될 확률이 더 높기 때문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벌써 10월이다. 11월이 되면 또 벌써 11월이라고 하고 앉았겠지. 시간에 쫓기듯 살면 일평생 시간 단위 앞에 꼭 '벌써'라는 말만 붙이다가 삶을 마감하고 말 것이다. 조금 더 가열하게, 조금 더 즐겁게, 에너지를 끌어올려 보자. 삶은 영원히 되풀이되는 수레바퀴 위에 있지만, 이 육신과 이 육신이 놓인 환경에서의 삶은 수만 번의 윤회 속에서도 단 한 번뿐이다. 그러니 매일, 매 순간을 정말 아깝고, 아쉬운 마음으로, 소중하게 대하자. 죽음은 늘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 말자. 







[주간단남] 속 알짜배기 사색만 모았다!

브런치북 보러가기



간단남 응원하기

작은 관심과 응원만으로도 지속해 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록

매거진의 이전글 癸卯년 辛酉월 세 번째 기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