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Jan 08. 2024

甲辰년 乙丑월 첫 번째 기록

[주간단남] 1월 1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3.12.25 (월) 


(..)

내리는 눈에 예외가 없듯 모두에게 크리스마스의 축복이 내렸으면 좋겠다. 너무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허무맹랑한 소리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눈을 보면 내려앉을 지붕을 걱정하고 새벽에 나가 일할 사람은 눈길 위에서의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삶에서도 어느 한순간만큼은 내리는 눈이 마치 솜처럼 몽글몽글하게 감성을 부드럽게 했을 때가 있었으리라.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사람의 일면만을 보고 그 사람의 전체를 판단해선 안 되며 한순간만을 가지고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정의 내려서도 안 될 것이다.


(..)

교육제도 하에 있을 때처럼 모두가 한날한시에 정해진 경로 위를 걷는 시기엔 모두가 같은 길을, 비슷한 속도로 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게다가 모두가 단 하나의 기준으로만 일렬종대를 세워 평가를 받으니 그 속에서 쉬이 자만과 열등의 꽃을 피워내기가 용이한 환경이다. 


폐쇄적인 것이, 통제된 것이 마치 온실을 닮았다. 오직 그 속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작물로 만들어 출하를 기다린다. 그곳에서 나온 양품들은 당연히 그와 비슷한 환경, 비슷한 평각 기준에서만 양품임을 인정받고 존속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나머지들은 더 크고 넓고 다양한 가치가 난무하는 '진짜' 세상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은 양품이 아니라 '본품'이 되어가는 여정을 시작한다. 비록 온실 속 환경에 길들여져 있어 본품으로서의 기질을 되찾는 데 많은 애로사항이 따르긴 하겠지만.


바깥 세계에는 출하시기와 품평의 기준이 천차만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온실 속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모두가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방식으로 뭔가를 이뤄내야만 한다고 믿으며 주변을 압박하고 스스로를 채근한다. 그러나 조급한 마음에 지나친 관심과 사랑을 담아 많은 물과 영양제를 투여하면 그 식물의 최후는 불 보듯 뻔하다.




23.12.27 (수)


(..)

자기 통제의 핵심은 타협하지 않음에 있다. 예를 들어 만보 걷기가 오늘의 목표인데 비가 오거나 미세먼지가 너무 심하다면? '잘 됐구나'하며 하지 않을 생각을 하는 건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어떻게 그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그것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목표를 위한 목표라는 맹목적인 태도가 아니라, 왜 그것을 하는지에 대한 자각이 바로 서야 한다. 건강 때문이라면 실내 운동으로 대체해도 좋고, 마음 수련이 목적이라면 독서나 명상으로 대체해도 좋을 것이다. '안 할 생각'으로 기회를 노리는 자세만 버리면 된다. 그것은 스스로를 뭘 해도 안 될 사람으로 포지셔닝 하는 지름길이다.




23.12.28 (목)


(..)

의무를 짊어질 기꺼운 마음이 없다면 의무감은 아침에 몸을 자동적으로 일으킬 충분한 명분이 되지 모한다. 이런저런 할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릴수록 더욱 귀찮음만 커져 포근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만들 뿐이다. 이럴 때 대부분이 사용하는 임시방편책이 '강제성'이다. 해야 하면서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페널티가 가해지는 것, 대표적인 것이 출근이다. 


그렇다고 그게 만능인 건 절대 아니다. 강제성은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게 만든다. 단백질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질소라는 물질이 우리 몸에서 독소로 작용하듯 강제성을 소화하는 과저에서 인간은 스트레스에 불가피하게 노출된다.


해결책을 섣불리 적진 못하겠다. 그나마 떠오른 것은 그러한 강제성이 스스로 부여한 것이어야 하고, 뒤따르는 것이 처벌이 아니라 보상이, 그것도 나와 타인에게 보상이 되는 것일 때라면 좀 낫지 않을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들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외면하는 것이  타인이 더 행복해질 기회를 빼앗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조금은 자발적 책임감이 생길지도 모른다.


(..)

어제 이(李) 배우의 부고 소식을 접했다. 참으로 허망했다. 죽어 마땅한 삶은 세상에 없다. 있다고 한들 누가 죽일 건데? 손에 피를 묻힌 그 사람이 과연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보는가? 이번 일은,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유명인의 자살 중 상당수는 대중이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은 총만 안 찼지 살인자들이나 마찬가지다.


표현의 자유라는 착각에 빠져 자신의 마음속 파렴치한 혐오와 증오를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쏟아낼 권리 같은 건 없다. 그들은 익명과 쪽수라는 가면과 그늘 뒤에 숨는다. 그렇게 행해진 무책임들이 모이고 모여서 커다란 에너지 덩어리로 뭉쳐서 송곳처럼 단 하나의 대상에 집중될 때 오는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본인 자신은 회사나 친구들 사이에서 누군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시하는 발언을 하거나 하다못해 음식점 직원이 조금만 싸가지 없게 해도 길길이 날뛰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연예인이라는 유명세엔 그만한 뒷감당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악플을 정당화하고, '죽은 건 안됐지만, 그러게 욕먹을 짓을 왜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악플에 동참했든 하지 않았든 모두가 공범이다. 비상식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키는 선동의 나팔수들과 함께 말이다. 특정 주제에 대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사이버 렉카들은 욕을 하면서 특정 주제에 꽂혀서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퍼나르며 '조회 수 코인'에 탑승하는 이 치졸하고도 추악한 행태를 어찌 '언론'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자유는 오만이요, 방자함이요, 방종이고 만용이다. 이러한 비상식은 개별 인간인 우리가 모두 비상식적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는 모두가 구도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본능처럼 각인된 이기심을 절제하고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가의 수장부터 이제 막 태어난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그 지향점에서 비롯된 에너지의 일관된 흐름이 언제나,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전체로서의 연결감, 그것이 결여됐기에 인간은 상대를 흉보고 악플을 단다. 우리는 결국 하나이기에 받은 만큼 돌려받게 되어있다. 무분별하게 타인을 비방하고 다니는 자들은 언젠간 자신이 세상에 어떠한 영향력을 끼쳐왔던 것인지를, 고스란히 되돌려 받을 것이다. 물론 왜 인지는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해 죽으려고 하겠지만.




24.01.01 (월)


(..)

서울로 올라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보신각 타종 행사의 열기를 아주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그곳엔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모인다. 지난 한 해가 좋았든 좋지 않았든 새해에 기대하는 바가 있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온다. 또는 그것이 자신만의 새해맞이 루틴이거나 혹은 남들이 해보는 건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거나.


각자의 동기가 어떠하든 초점은 지나간 2023년이 아닌, 다가올 2024년에 모두 맞춰진다. 모두의 에너지가 한 곳에 집중되어 새로운 기운이 들어오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가장이 퇴근 후 돌아왔는데 집에서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면, 그곳은 죽은 집안이다. 새해에 대한 인간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송구영신. 함께했던 올해를 보내주고, 다가오는 새해를 설렘과 반가움으로 맞이해야 그 기운이 손님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끈끈한 동반자로서 1년을 또 함께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신경을 쓰든 쓰지 않든 새해 달력은 넘어간다는 식의 마인드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만이 사실이고 진실이라는 편협한 시각. 더 넓은 세상, 보이지 않는 영역에 오감이 캐치하지 못하는 진실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들. 


(..)

갑진년에 나는 어떠한 시간들을 보내게 될까. 어찌 되었건 23년에 비해선 더 활발히 움직이는 시기를 맞이하겠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다양한 시도를 하고 그 와중에 토(土)의 끈기 역시 잘 발휘가 되니 하고 있는 것들도 안정적으로 잘 가져갈 테고. 올해도 잘 부탁한다. 여전히 매일 한 걸음씩 꾸준히 성장하기를, 매 순간에 늘 현존할 수 있기를. 늘 세상과 사람에 대한 애정과 온기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24.01.03 (수)


(..)

마음이 불안할 땐 답은 두 가지뿐이다. 스스로의 진심과 선의에 집중하기. 모든 상태는 최종 목표이자, 동시에 그것에 이르는 과정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기.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에 도달할 스스로의 모습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바라보면서 그저 그러한 당연함에서 기인한 자연스러운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을 묵묵히 이어나가는 것.




24.01.07 (일)


(..)

원리와 이치를 아는 것. 그게 나의 관심사이자 그것을 구하는 게 나의 기본 태도다. 분야를 막론하고 말이다. 기전을 이해해야 근본에 가닿을 수 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고 그 둘을 연결 짓는 중간다리가 바로 과정이다. 과정은 결과가 일어나기 위한 필수 관문이다. 아무리 그 단계를 줄여서 두 개로 설명한다고 해도 원인 및 과정, 그리고 결과 이렇게 나눌 수밖에 없다. 


근본 원인이 중요한 이유는 그래야 결과에 대한 근본적인 접근과 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파민 중독자가 매일 같이 숏폼을 보는 습관을 유지하면서 업무를 볼 때 집중이 안 된다며 제아무리 자신의 머리통을 내리친다 한들, 명상을 한다 한들, 도파민 중독의 습관을 끊어내지 못하면 밑빠진 독 신세를 면치 못한다. 


거기에서 더 들어갈 수도 있다. 결과는 또 다른 현상의 원인이 되고 새로운 과정과 그에 따른 새로운 결과로 이어진다. 삶이 펼쳐지는 것을 수레바퀴에 비유하기도 하듯이 사건과 사건이 계속해서 맞물리며 이어져 가는 것이다. 그렇게 근본에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바퀴가 굴러가게 만든 핵심적인 힘에 다다른다. 그것은 우리 안에 깃든 전체로서의 자아를 자각하는 일이 될 테다. 늘 머리로만 말하는 그 경지. 


그것이 각 개인의 삶이라는 다양한 형태로 펼쳐지는 파노라마의 존재 이유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이자 실은 더 커다란 근본 자아가 스스로를 인식하고자 거울을 볼 때 그 안에 펼쳐지는 무한한 형태의 가능성들이다. 굳이 그것을 '그'라고 칭한다면 그가 보는, 인식하는 세상은 없다. 그렇기에 그것을 위해서 각기 다른 존재들에 그 자신의 일부를 깃들게 한 것이다.


우리는 각자가 고유한 존재인 동시에 모두 같은 하나이기도 하다. 그 안에 깃든 기본적인 세팅값은 있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운명이다. 다만 우리가 자각하고 내면의 더 큰 자아를 인지할 수만 있다면, '그'와 의식적 합일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세팅값을 넘어서도 살아갈 수 있다. 변수가, 예외가 될 수 있다. 팔자대로 사는 게 맞다. 동시에 팔자대로 살지 않는 것도 맞다. 


이러한 역설이 곧 진리이다. 진리는 음양의 형태로 무극이라는 전체성을 표현한다. 양극성은 진리의 또 다른 얼굴이다. 분열될 대로 분열된 작금의 사회는 더 큰 전체를 조망하기 위한 전조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 펼쳐지는 과정 속에 있는 매 장면 장면들은 그 자체로 지난 과정들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전체를 보고 멀리 보는 시선과 매 순간에 오롯이 머물고자 하는 시선이 모두 필요하다. 모든 분열된 양극의 관점들은 결국 하나다.







[주간단남] 속 알짜배기 사색만 모았다!

브런치북 보러가기



간단남 응원하기

작은 관심과 응원만으로도 지속해 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록

매거진의 이전글 癸卯년 甲子월 세 번째 기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