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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an 15. 2024

甲辰年 乙丑月 두 번째 기록

[주간단남] 1월 2주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4.01.08 (월) 


(..)

일시천금(一矢千金). 활을 쏠 때 매 화살을 마치 천금과도 같이 소중히 여기란 뜻이다. 그것은 기시감보다는 미시감을 더 익숙하게 느껴야 함을 뜻한다. 일상 속에서 쉬이 마주치는 것들 사이에서 생경한 감정을 느껴보려 하는 의식적인 태도가 필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

만일 누군가 어떤 주장의 근거를 보지도 않고 주장의 내용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며 자신이 접한 정보를 근거로써 내놓기만 한다면? 양극화의 시작이다.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걸까? 인간이 어떤 정보를 습득하고 받아들이는 배경과 상황 등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가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았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인 게 첫째 이유다. 그러니 상대방의 주장의 근거는 들어보지도 않고 자신이 본 것을 들이민다. 자신이 시행착오를 겪어봐서 아는데 상대의 수준도 자신과 비슷할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은 자신이 더 앞서있다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스레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진다. 자신이 믿는 정보가 최신 정보고, 너무나 옳은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에, 그리고 상대는 이것을 틀림없이 모를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의 근거는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근거를 역으로 들이밀 수 있는 것이다.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서 살펴보면 이 얼마나 무례하고도 무식한 행위인지 알 수 있다. 


자기 확신은 지나치면 안 된다. 믿음은 갖되 맹신까지 하지 않는 게 건강하다. 믿음에는 근거가 필요하지만 강한 확신에는 근거가 꼭 필요하진 않다. 확신은 어쩌면 그저 선택의 문제다. 이유가 있어서든, 아니면 그냥 그게 옳다고 직관적으로 느낌이 와서든, 확신하기로 결정이 되면 일단 확신이 드는 것이다. 


믿음과 확신이 더해지면 그건 신념이 된다. 신념은 나를 이끄는 힘이 되어야지, 상대를 배척하기 위해 그 기능을 발휘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모두가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으로 사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양극화의 우를 범하면 국가나 사회 등의 법과 규칙으로 강제할 수밖에 없다. 악랄한 지배자에게 '우매한 대중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쥐여줄 개개인이 되어버리면 안 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배우고 생각하고 성장할 의무가 있다. 스스로를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대중의 일원으로서, 우리 모두의 권익신장을 위해서. 모두가 더 살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24.01.09 (화)


(..)

주는 것의 기쁨을 안다면 몸의 힘듦도 감수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자식이나 연인, 부모님, 친구 등 내가 아끼는 존재를 위해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은 몸이 힘들지는 몰라도 마음만큼은 그렇지가 않다. 자발적인 행동에는 정신적 피로도가 누적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육체 피로까지 쌓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므로 언제나 스스로가 바로 섰을 때, 오직 그때만이 남을 위한 진정한 헌신이 가능하다.


(..)

'바닥부터 시작하기' 정신은 요즘 사람들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마인드다. 안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은 기본적인 성정이 오행상 '목(木)'의 기질이라 남 눈치를 보고 자신과 남들을 비교하는 게 당연한 문화권이다. SNS가 발달하기 전부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우리 민족이다. 거기에 현대 사회에서는 인터넷과 SNS의 발달까지 가세하여 그 기본 기질이 강화되어 기준치가 매우 높아진 탓이다.


동시에 저성장에 인구감소라는 정체기에 접어들어 높아진 기준을 충족할 재간이 못 되니 거기에서 간극이 생기고, 그로 인한 좌절감과 괴리감은 나날이 높아져만 간다. 한 번 높아진 기준은 다시 내려가기가 어렵다. 우스운 건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기준치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아파트에 살다가 빌라로 못 가고, 자차를 유지하다가 뚜벅이로 되돌아가는 건 어렵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원룸에, 고시원에 살면서 결혼 생활은 신축 아파트에서 못할 거 같으니 아예 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뚜벅이면서 중고 경차는 부끄러워서 안 산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과 이상의 간극과 괴리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OECD 행복지수 만년 하위권 신세를 면키가 어려울 테다.




24.01.11 (목)


(..)

생각을 의도로 만드는 것은 생각을 실천하는 행동이다. 행동하지 않는다면 사실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생각을 했다면,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겠다는 데까지 다다랐다면, 그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곧장 행동에 옮겨라. 그게 JUST DO IT 스피릿이리.




24.01.12 (금)


(..)

누군가가 못마땅스럽다면 인간은 쉽게 '비정상', '비상식', '미친' 등의 딱지를 붙여버리기 일쑤다. 혹은 우열을 나누는 등급화를 시전하기도 한다. 때로는 분노나 혐오라는 감정까지 사은품(?)으로 지급하기도 한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하는 건지, 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 건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다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못마땅해하고 분노를 느끼는 지점들은 사실 내 안의 또 다른 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특징이나 욕망이 억눌려 있어서 발현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자신도 이미 다른 영역이나 상황에서는 그러고 있는데, 혹은 과거 한때에 그랬었는데, 인지를 전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요는 이것이다. 어떤 경험이 자신을 그대로 투과하지 못하고 감정적 찌꺼기를 남긴다면 필시 그것은 '나'라는 필터의 거름망에 뭔가가 걸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라는 필터의 생김새, 즉 자신의 내면을 살피기보다는 그런 잔흔을 남긴 대상, 사건, 사람 등을 탓할 뿐이다. 그러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마음공부는 결국 스스로와의 끊임없는, 평생에 걸친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코스피, 다우 존스 지수가 오르고 내리는 것에는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어찌 자기 자신이 무엇에 오름세와 내림세를 타는지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관심조차도 주지 않는 것인가.


의수, 의족, 인공심장, 이런 게 얼마인 줄 몰라서 사람들은 '정품'이자 '순정'인 자신의 몸뚱어리를 함부로 굴리고 자신의 내면에 얼마나 빛나는 별이 깃들어 있는지를 모르고 바깥의 풍경에만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것일까. 


답은 결코 외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함을 오늘도 유념하는 하루가 되자.



24.01.14 (일)


(..)

5:46분에 눈이 떠졌다. 눈이 처음 떠졌을 때부터 왠지 도로 자고 싶지가 않았다. 이유를 정확히 알기는 어려웠다. 왠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저 이불 밖에서 무언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요 몇 개월, 특히 해자축월亥子丑月을 지나오면서 늦잠과 늦은 기상을 달고 살아온 내게 일어난 예상 밖의 상황이라 당황스러웠다. 


놀라운 건 마치 푹 자고 난듯한 가벼움마저 느껴졌단 것이다. 아침 특유의 찌뿌둥함이 크게 느껴지지 않아 습관처럼 키던 기지개도 켜지 않고 그저 목만 가볍게 한두 차례 돌리고 말았다. 뭘까. 왜 나는 일찍 눈이 떠진 것일까.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일단 기분은 좋다. 아주 깊은 고요 속에서 이렇게 모닝 페이지를 쓰는 게 얼마 만인지!


(..)

사주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은 반드시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주 주인의 일면을 비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관점으로 한 사람을 조명할 수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그는 천태만변의 존재가 된다. 사람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이기 때문이다. 사주 역시 그러한 하나의 관점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주가 전제하는 맥락에서는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주를 통해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유념해야 할 것은 틀리면 어떡하냐는 생각이 아니라 그래서 이것으로 사주 주인에게 어떠한 임팩트를, 어떠한 솔루션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과거 맞히기? 그건 무당이 더 잘한다. 맞혀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포 형성? 차라리 신비한 척 우월한 척 대신 따스한 미소로 상대를 바라보라. 신뢰감 형성? 과거도 맞히고 현재도 맞힌다면 미래도 맞히겠노라는 단순한 논리? 그것은 인간은 100% 운명에 끌려다니는 피동적 존재라고 단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명리학은 미래를 찍어 맞히라고 만들어진 학문이 아니다. 사주는 큰 틀을, 큰 경향성을 제시할 뿐이다. 0과 100처럼 양극단의 이분법적 결과를 제시하는 게 사주가 아니다. 심지어 타로나 주역으로 점을 쳐도 YES or No의 답변을 얻으려고 점을 치는 건 우매한 것으로 본다. 모든 미래를 다 내다볼 수 있다면 명리학자들이야말로 LH 직원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토지를 다 매입하여 시세 차익을 거둬서 거부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결국 명리학의 효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현재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준다는 데 있다. 지금의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에너지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어떠한 그것들과 어떠한 작용을 해나가는지를 보여준다. 고맙게도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까지 기록으로 보존해두었으니 매우 감사한 도구가 아닐 수 없다.


혹자는 명리학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일이 잘 풀리는 날과 그렇지 않고 꼬이는 날들의 특징들을 면밀히 기록해두고 자신만의 패턴을 발견하고 그런 패턴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들에 대한 가설까지 세우고 스스로 검증해나가기도 한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자는 이미 자신만의 '명리'를 터득해 나가는 중인 셈이다.


갑을병정, 목화토금수를 그저 문자로서, 지식으로서 아는 게 명리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 삶에 대한 진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로써 접근할 때 진정한 '명리'를 구하는 전제가 성립된다. 소위 미래 예측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이치를 파악했을 때 부산물처럼 따라오는 것이지 명리학의 존재 이유도, 목적도 아니며 그리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대전제가 성립되지 않은 자들이 명리나 점술을 혹세무민의 도구이자 음지의 신변잡기로 전락시킨 것이다.


(..)

내 직관의 후각이 반응하는 곳으로, 그렇게 강아지가 자유롭게 킁킁대며 자신의 발길의 방향을 정하듯 나도 그렇게 살아보고자 한다. 그 길목 위에 어떤 선물이 있을지, 기대가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증을 가지면서 말이다. 그런 설렘이 지속될 때 진짜 삶이 비로소 시작됐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머무는 장소와 현재의 상황이 아니라 어떠한 감정 상태인지가 어떠한 경험을 하게 될지를 결정한다. 감정이 에너지이고, 나 역시 에너지이며, 세상 만물이 곧 에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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