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단남 Feb 26. 2024

甲辰年 丙寅月 네 번째 기록

[주간단남] 2월 4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4.02.19 (월) 


(..)

이것은 지갑을 주웠는데 신원을 특정할 그 어떤 단서도 없이 지폐 더미만 들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자신이 주웠다며 그것을 덥석 가져버리기도 하겠으나 누군가는 한 장의 지폐도 건드리지 않은 채 경찰서에 가져다준다. 재물을 탐하는 자는 괴물이 되고 만다. 명리학으로 말하자면 탐재괴인이 되겠다.


세상에는 저마다 자기 몫으로 들고 온 것이 있다. 그것이 육체든, 자질이든, 재능이든, 돈이든 다 마찬가지다. 내 몫이 있고 아닌 것이 있다. 내 것이라면 마음을 비우고 편히 머물러도 언젠간 절로 찾아온다. 내가 그에 응당한 사고와 행동을 절로 하게 되기에. 그러나 내가 억지로 억지로 찾아가 여러 번 노크를 하고 심지어는 쟁탈해와야 하는 것이 있다면 내 것이, 내 돈이 아니다.


모두가 돈 벌 궁리와 함께 어떻게든 사수할 생각, 숨겨놓을 생각만 하는 것은 제 몫이 아닌 돈들이 세상에 많다는 증거다. 모두가 제 몫만을 겸허히 취하려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조화가 꽃 핀다. 




24.02.21 (수)


(..)

좋고 나쁨이 내 생각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면 평소에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만 하는 사람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걸까. 여기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생각만으로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다 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믿거나 느끼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혹자는 그것에 대한 확신을 100%라고 장담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본디 이성적 '동물'은 아니기에.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운명'의 존재다. '명'이 그 사람의 천성과 걷게 되는 어떤 필연적 경향성을 이야기한다면, '운'은 그 사람이 지나게 될 시기의 흐름의 성질, 환경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보다도 더 크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을 100% 지배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운명에 순응하면서 사는 자와 투쟁하면서 사는 자로 나눌 수 있다. 그렇게 나뉘는 것마저도 어쩌면 그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 운명의 장난질(?)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현재 믿는 한, 느끼는 바로는 유독 인간에게는 변수가 많다는 것이다. 그것이 에고라는, 욕망이고 또 하나는 사실상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가장 높은 차원에서의 '의지'가 그것이다. 그 두 가지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합치냐 대치냐에 따라, 그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이라는 재료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한 삶의 레시피가 탄생한다. 같은 재료로도 그러할진대 재료가 살짝만이라도 달라진다면? 아예 다른 재료라면?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다시 처음에 던진 '끌어당김' 관련 질문으로 돌아오자면, 그런 운명과 같은 거대한 흐름이 있다면 크게 봤을 때 그 사람은 그런 운로의 트임(개운)이 남들보다 빨리 왔었고 그때 마침 자신이 하고 있던 행동이 그것이었던 것일 따름일 수도 있다. 다만 그가 그것을 '인과관계'로 멋대로 정의한 것이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행위들을 미리부터 하고 있었기에 그 효과가 극대화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런 행위를 믿고 행동으로 실천하게끔 그 이전 운이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때 자신이 그 행동을 하는 상태에 에고와 참 의지의 합일 여부도 역시 최종 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결국 논점의 최종 결과는 손가락을 보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영역의 존재는 분명하다. 다만 그것에 어떻게 가닿을 지는 결국 개개인이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참고가 될 뿐, 맹신의 대상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 이 글 역시 마찬가지다.




24.02.24 (토)


(..)

결정나 버린 것은 과거요, 오지 않은 것은 미래요, 진행 중인 것은 현재다. 그런데 현재라는 순간도 개념적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이 문장을 쓰는 순간 이것은 '지금'의 순간을 지나 과거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미래 역시 이 순간 현재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매초 말이다. 지금 쓰는 이 문장은 내가 첫 문장을 쓰던 그 순간에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였다. 그런데 지금은 현재가 되었고. 쓰는 순간 과거가 된다. 


나는 첫 문장을 첫 줄에 쓸 때 지금 이곳, 노트의 10번째 줄에는 어떤 내용을 쓰고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나는 짧은 순간의 흐름 속이지만, '지금'이라는 무대 위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경험한 셈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경험은 오직 '현재'로서만 체험이 가능하다. 과거는 회상으로서만, 미래는 계획과 상상으로서만 존재한다. 머릿속이 아닌 체험으로서 일어날 때 그것은 현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순간은 사실 그러니까 현재 속에 모두 깃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차원의 존재가 현시점에서 과거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이유도 우리가 과거나 미래라고 일컫는 것들이 3차원의 인식적 한계에서 비롯된 개념적 구분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은 현재라는 실재적 무대 위에서만 현실화되기 때문이다. 타로나 육효 등의 점술로 보는 미래 역시 이런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미래는 고정불변하지 않다. 비가 오더라도 강수량의 차이는 생길 수 있듯이 현재가 미래를 결정하는 동시에 미래도 현재를 결정하며 서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변수는 언제나 현재에 존재한다. 내가 지금 어떤 행동을, 사고를 하느냐, 어떤 미래를 그리느냐에 따라 미래로 향하는 길의 항로는 조금씩 바뀔 수 있다. 과녁이 정해졌다고 한들 내가 화살을 어떤 방향으로 내보내느냐의 사소한 차이 하나가 궤적의 커다란 차이를 빚어내는 것이다.



24.02.25 (일)


(..)

요즘에는 원석에도 관심이 간다. 어릴 적 아버지가 수석 수집이 취미셨는데 거기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원석 자체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 축적된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모로 나의 흥미를 자극한다. 전생에 나는 분명 동양, 서양 각각에서 영적 신비를 탐구하던 사람의 삶을 최소 한 번씩은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 화두는 이제 이것이다.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서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 그것을 차별화/전문화하여 거기에서 가치를 창출할 수도 있고, 그것을 사업화/시스템화하여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길도 있다. 그도 아니면 철저히 취미와 향유의 영역으로만 남기고 뿌리를 내리는 길은 다른 분야를 궁구하는 길도 있겠다. 


(..)

결혼에 대한 생각도 이따금씩 드는 것이 적령기가 오긴 왔나 보다. 일반적 의미의 결혼을 논할 땐 신중해야 한다. 특히 출산이 전제된 결혼의 경우엔 더더욱. 생명이 걸린 주제는 엄연히 객관적인 '때'가 중요하고, 사람은 어떻게든 무언가가 닥치면 마주하고 해결할 힘과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생각보다 개인의 의지에 관한 이슈인지도 모른다. 간절하게 낳고 싶어 미치겠는데 경제적 형편이나 육체적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포기한 사람보다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거기에 애까지 생기면 어쩌려나 하는 부담감이 훨씬 더 큰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어려운 시절에도 아이는 나왔다. 어쩌면 우리는 '신중'이라는 키워드 뒤에 숨어 개인의 책임, 희생, 헌신을 애써 외면하고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이유를 온전히 나라나 사회 탓으로 만 돌리면서 말이다. 모든 현상은 쌍방의 조화에서 비롯된다. 몸의 병은 마음에도 원인이 있고 그 역도 성립한다. 사회 현상의 원인은 비단 나라만의 탓도, 개인만의 탓도 아니다.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늘 각 이해당사자들은 상대에게서 무엇을 더 뜯어내고 얻어낼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더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야 한다. 


서로가 그렇게 자신의 의무에 집중한다는 상호 신뢰가 형성된 사회야말로 살기 좋은 사회다. GDP나 SOC는 그에 비하면 중요한 게 아니다. 일자리 창출 같은 이슈도 마찬가지.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 무슨 탄탄한 사회적 자본과 안전망, 그리고 양질의 일자리가 나오겠느냐 이 말이다.







[주간단남] 속 알짜배기 사색만 모았다!

➡️브런치북 보러가기



단남을 응원해 주세요

작은 관심과 응원만으로도 지속해 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甲辰年 丙寅月 세 번째 기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