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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Jun 17. 2024

甲辰年 庚午月 두 번째 기록

[주간단남] 6월 2주 차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4.06.12.(월) 


(..)

어영부영 6월은 간다.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기간 동안 얼마나 목표로 했던 것들을 달성했는지를 지나간 시간에 대비해서 보는 것. 다른 하나는 그저 경험하는 모든 순간들에 충분히 머물렀나를 생각해 보는 것.

우리는 대부분 전자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시간을 지나왔다는 흔적과 전리품 같은 증거가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야 지나온 시간이 헛되지 않는다고, 지나온 삶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자기 자신과 남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

앞만 보고 가면 많은 것을 놓친다. 주변의 풍경도, 목표와 무관한 상황에 대한 대처도, 그밖에 우리가 '삶'이라 부를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낸다. 게다가 그런 저돌성은 때로는 돌부리에라도 걸려 넘어지거나 체력이나 정신력이 모두 소진되어 고꾸라지기라도 하면 마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게 만들어버린다. 

어떤 식으로든 목표 달성 하나만을 생각한다면 현재, 매 순간이라는 가장 중요한 뿌리를 놓친다. 민족에게 민족의 정체성, 민족적 뿌리가 중요하듯 생(生)의 뿌리는 매 순간 안에 있다. 우주는 매 순간 흐르며 변하는 강물과도 같다. 늘 살아서 움직인다. 인간도 우주의 일부이니 그런 생의 흐름 속에 스스로를 내맡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간 자신이 세상의 전부라 믿었던 것에 대한 집착으로 얼룩진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을 때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생의 흐름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가벼움과 경쾌함 속에서, 현재라는 땅 위에 뿌리를 굳건히 내린 채, 더 다양하고 많은 것을, 그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증명하는 삶 대신 경험하는 삶을 살자.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24.06.15.(토)


(..)

이번 주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놀랍게도 이번이 두 번째 모닝페이지다. 이번 주는 대체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 한 주였다. 그중 하루는 지난주에 말했던 달리기를 시작하자는 결심을 이행하고자 조금 늦게 일어난 상황에서 모닝 페이지보다 더 우선순위를 갖기도 했다.

(..)

공유와 소통은 비례할까? 소위 '일 잘러'들은 공유를 생명처럼 여기기도 한다. 공유와 소통은 비례관계에  있다는 듯 공유하지 않는 문화는 무조건 불통의 아이콘이라 단정 짓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하는 의문이 요즘은 고개를 든다. 핵심은 공유라는 행위의 목적에 있다고 생각한다. 

공유의 목적이 소통에 있는 경우 그것은 기본적으로 소통을 강화한다. 자신이 아는 정보, 사안 등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혹은 오히려 그 사람에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에, 그리고 그 사람의 상황이 이런 공유를 더 받아도 정보의 홍수에 익사하지 않을 상태인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한 뒤에 이를 공유하는 식이다.

반면에 공유를 위한 공유는 소통보다도 공유 자체가 목적이다. 그 이유는 본인은 자기 몫을 다 했으니 책임 소재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내용을 숙지하지 못해 생긴 모든 문제는 공유 받은 것을 숙지하지 못한 사람의 책임이지 본인 탓은 전혀 없다는 듯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정보가 얼마나의 중요도나 의미를 갖는지, 담당자는 현재 어떤 상황인지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대부분의 직장인의 이메일에 무의미하게 쌓여가는 C.C(참조) 된 이메일들이 그것에 대한 방증이다.

(..)

수단은 반드시 그것이 기능하는 어떤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이너마이트도 처음에 만들어질 때는 살상 목적이 아니었던 것처럼.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와 이해도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나는 인간의 행동보다 의도가, 결과보다 과정이 인간성과 인간미를 갖춘 세상을 유지하는 밑거름이라고 믿는다.

그런 마음이 AI를 위시한 기술이 지배적인 세상에 우리가 취해야 할 본질적 움직임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과주의와 합리주의자는 AI를 따라갈 수 없다. 이제 답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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