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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단남 May 02. 2022

[주간단남] 4월 4주 차 아침 생각

22.04.17(일) - 22.04.23(토)

[주간단남] 시리즈에서는 제가 매일 아침 30분 가량 글명상을 했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고 나누고 싶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발췌한 문장들은 제가 적었던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맞춤법 오류, 비문 등 많을 수 있음)

굵은 글씨로 표시한 문장은 제가 새롭게 깨달았거나 꽂혀 있는 '생각'을, 밑줄 친 문장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부분을 표기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적 표현을 통해의식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 <자기결정> 中





22.04.26 (화)


(..)

분명 예외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예외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마음먹은 것과 실제로 펼쳐지는 현실 간의 상당한 괴리로 인해 나는 이따금씩 괴로움을 느낀다. 


(..)

작가가 된다면 어떤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니 좋다고 한다. 떠올려 본다, 작가가 된 내 모습을. 나는 글로 표현된 내 생각들로 인해 누군가 영감을 받고 위안이나 용기를 얻는다면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내 글의 작품성에 대한 호평을 듣는 것도 당연히 감사할 일이지만, 더 큰 의미는 역시 사람들이 얼마나 각자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내 글을 통해 받는지에 있다.


(..)

내 필체에는 일관성이 부족하다. 자음과 모음의 크기도 모양도 들쑥날쑥이다. 어디선가 본 것은 있어가지고 모양을 제법 흉내도 내보고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일관성이 갖춰지지 않아서 삐뚤빼뚤 해 보이는 것이다.


(..)

일관된 환경에서 특유의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것을 나는 분명 막연하게나마 느낀 적이 있다. 그것을 믿으라. 루티너리한 삶은 삶과의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움직임에 가깝다.




22.04.27 (수)


(..)

어제 펜크래프트씨의 영상을 봐서 그런가. 필체가 조금 멋져졌네. 일단 크기를 좀 크게 써야 펜을 놀릴(?) 공간의 여유가 생기는구나. 공간의 여유가 생기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는지 딱히 펜을 신경 써서 천천히 휘놀리는 것도 아닌데 필체가 확연히 달라졌다. 단지 초성, 중성, 종성의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것만이 필체가 못나 보이는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크기라는 또 하나의 요소를 발견했다.


(..)

얼마나 위대한 발명인가. 나는 잠들어 있을 동안 계속해서 시간의 흐름을 추적하고 있다가 1초도 늦음이 없이 바로 내가 지정한 그 시각에 알람을 울리는 시계라는 존재는 말이다. 우린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고, 시계는 우리가 잠들 때 첫 근무를 시작하여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근무를 마치고 휴식기에 접어드는 것 같다.


(..)

알람이란 것을 인생에 최초로 적용했을 땐 그것만으로 칼 기상이 충분히 가능했겠지만,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어느새 우리는 급기야 1분 단위로 알람을 맞춰두기 시작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지각이 확정되는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5초의 법칙'도 그것이 갖는 효과가 알람처럼 순간적으로 각성을 시켜 행동을 방해하는, 그리고 현재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방해하는 생각들을 잠시 사라지게 만들어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원리라면, 그 효과가 알람처럼 일시적이지 않겠냐는 것이다.


(..)

벌금을 걷거나 인증의 방식을 통해 선의의 경쟁을 유발하는 각종 커뮤니티, 스터디의 방식 역시 효과가 있으나 이 역시 알람이나 5초의 법칙과 같이 근본을 뿌리 뽑는 방식이라기보다는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

보통 태도가 행동을 낳는다고 한다. 따라서 행동을 교정하려면 원인인 태도를 바꾸라고 한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행동 역시 태도를 만드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억지로라도 그 행동을 하다 보면 그에 준하는 태도를 갖다 붙여서 인지부조화가 오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 미라클 모닝 클럽처럼 강제적인 아침 기상을 하다 보면 계속해서 억지로, 불평불만을 하며 하는 지점에서 어느 순간 '받아들임'과 '즐거움'의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특이점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을 직접 공략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더 근본이 쉽게 공략되기도 하는지도 모른다. 근본 원인이란 너무나도 개인차가 심해서 그것을 개별적으로 찾아 뿌리 뽑는 방법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누구나 예외 없이 각자의 근본을 해결하면 드러날 '공통적인' 최종 결과의 모습을 우선적으로 행하게 함으로써 역으로 각자의 근본 원인이 사라지게 되는 것과도 같은 이치 아닐까?




22.04.28 (목)


(..)

그래 내게 여전히 돈이 남아있다. 내게 돈이 있다. 이게 해빙이 효과가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돈이 있다는 것! 있다는 사실 그 자체! 그게 해빙의 결과물이다. 다만 나는 빙산의 일각만을 보고 '에계, 이게 해빙이야?'라며 Having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이라는 빙하를 녹여버리는 '해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실제 내가 연습한 환경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 그게 무의식에 새겨지고 있을 그 연습의 흔적들을 의식적 차원에서 드러날 수 있게 해주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그렇게 무의식에서 의식적 차원까지 한 번 끌어올려진 것은 얕은 무의식의 영역에 자리 잡아 일상적인 레벨에 머무르게 된다. 


이때가 성장이 이뤄지는 시점이다. 이러한 패턴을 반복하면서 인간은 발전하는 것이다. 그 추세는 계단이 그려지는 것과 같으며 더 큰 관점에서 보면 언제나 우상향을 이룬다. 이것은 성장과 노력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를 막론하고 모두에게서 보이는 예외 없는 패턴이다.


(..)

불평불만하는 것. 이 역시 없음의 렌즈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에 속한다. 이것은 때로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대해 객관적인 진술을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감정에 있다. 어떤 태도를 지니고, 어떤 언행을 드러냈을 때 자신이 어떤 기분을 느끼느냐. 여전히 편안한 상태라면 있음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딘가 긴장이 느껴지고 몸 내부의 에너지 흐름이 달라지면서 머물고 있던 평화의 상태가 깨지고 불안, 짜증 등과 같은 감정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자신이 지금 없음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봤다는 증거다.


(..)

도처에 깔린 없음의 렌즈의 유혹에서 자유로우려면 일단 가장 먼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한 걸음 떨어져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급적 일상 속에서 그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그 자체가 곧 해빙이 될 것이다.


우스운 것은 방금 이 문장을 적자마자 만년필 잉크가 또 잘 안 나와서 조치를 취하면서 내가 지금 모닝페이지에 몰입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만년필의 몸체를 열어서 잉크가 더 잘 나오도록 조치를 취하는 데 고작 10초도 걸리지 않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흐름이 끊겨 중요한 것을 놓칠까 우려하는 마음은 편협하기 그지없다. 이 역시 없음의 렌즈다.




22.04.29 (금)


(..)

꿈이 크면 깨져도 그 조각이 크다고 했던가. 3일을 5시에 일어나고 오늘은 6시에 일어났더니 늦잠을 잤다고 생각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6시에만 일어나도 일찍 일어난 편이라 생각하던 나였는데 말이다.

(..)

나는 다시 태어나도 또 지금의 부모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다. 다음 생엔 입장을 서로 바꿔서 태어나도 좋겠다. 자식 된 입장에서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현생에서 모두 갚기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생에서는 내가 이미 한차례 부모님의 부모였을지도 모른다.

(..)

이 세상의 모든 일들 중 결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단순히 내 개인적 감상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다. 버스에서 만난 여러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조차도 다 인연이다. 단지 우리가 거기에 이렇다 할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을 뿐인 것이다. 이 세상에 그냥 우연히 일어나는 일도, 우연히 만나는 사람은 없다. 

(..)

세상을 이루는 큰 법칙 중 하나가 바로 인과율이다. 선행을 베풀면 반드시 언젠가 되돌려 받으며, 악행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그것이 펼쳐지는 방식이 복잡하고 광범위하여 언제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될지를 오감이라는 우리의 편협한 지각 체계가 갖는 한계로 인해 감지하지 못할 뿐이다.

(..)

자유는 소중한 가치가 분명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일정 부분 내려놓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와 사랑이 충돌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사랑을 택할 것이다. 사랑만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 사랑이 이 세상을 밝히는 촛불이다.






[주간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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