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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ul 25. 2017

인간은 벌레만도 못한 죄인인가?

# 06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인간은 아니라고 우긴다.


■ 성악설과 성선설


동양에서는 우리 인간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하나는, 선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믿는 성선설이고, 다른 하나는 본질적으로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성선설은 맹자가 주장했고, 성악설은 순자가 주장했다. 이들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키워주거나 악한 본성을 억제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학문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성경은 어느 쪽일까?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감탄을 하셨으므로 선하게 창조된 존재다.
그런데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인간을  ‘원죄'를 가진 숙명적인 존재로 본다. 심지어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인간의 가치를 내리깎는다.

성서의 내용과 배치되는 것인데 우리는 왜 인간에 대해서 ‘죄인’이라고 여기는 것에 익숙하여졌을까?
중세의 시대 ‘천동설’이라는 가설이 과학의 발전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사실임이 밝혀지는 동시에 중세 교회의 타락으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은 바가 컸다. 과학의 발달은 과거에 진리라고 여겨지던 것들의 허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종교적인 신념으로 강요하던 진리를 의심하게 했다. 의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허구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과학에 대한 신봉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윈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윈의 '진화론'이 '창조론'을 뒤엎는 이론이라 표면적으로는 반대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아주  자연스럽게 ‘적자생존, 약육강식’으로 대표되는 ‘경쟁’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리처드 도킨스에 의해 ‘이기적 유전자’라는 학설로 발전했고, 과학의 발달로 신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인간이 극복해 가면서 ‘무신론’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서 일어난 운동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데 ‘창조과학회(창조신학회)’가 그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사실이다. 문자 그대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것이 창조론자들의 주장이며, 그들은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증거들을 수집했다.


그래서 그들은 노아 방주의 파편도 찾았다고 주장하고, 과거에 고대 근동 지방에 큰 홍수가 있었던 흔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의 노아 홍수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거짓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들은 과학이라는 우상을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에 의해 오늘 진리인 것이 내일은 언제든지 거짓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창조론자들의 주장은 종교적 근본주의와 연결이 되는데, 17세기 북아일랜드 아르마그 성공회의 대주교였던 ‘제임스 어셔 James Ussher’는 성서에 등장하는 아담의 족보를 바탕으로 구약성서의 연대를 역으로 계산해서 우주 창조와 인간 창조의 시점을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오전 9시’라는 황당한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주의 기원과 탄생을 설명하고 확증하는 책으로 읽으면 안 된다. 성경은 의미와 상징의 언어로 그 시대상황 속에서 신의 뜻을 묻고, 신에게 응답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밝히는 책이므로 '의미와 상징'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눈으로 창세기를 읽으면 이것은 우주 탄생의 기원을 밝히는 책이 아니라 '인간의 인권에 대한 선언문'으로 볼 수 있다.


신의 대리자 바로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아니, 당신도 피조물에 불과하며, 당신의 노예인 우리도 똑같은 피조물이다.'
라는 인권선언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 선한 존재로 창조된 인간


인간 존재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 우리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나 살기 위해서 남을 죽여야만 하는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의 유전자’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도록 창조된 이타적인 존재요, 자기보다 약한 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함께 아파하며 공감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등등 수없이 많은 말씀이 우리 인간은 공감하는 존재요, 이타적인 존재요, 선한 존재요, 복 받은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함'으로 신과 인간의 더불어 삶, 일치까지 나아가고 있으니 성경은 인간을 끊임없이 긍정적인 존재요, 선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는 자꾸만 죄인 취급을 하고,
원죄를 주장하고, 끊임없이 회개할 것을 요구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의 공로로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 존재임을 각인시켜야 끊임없는 면죄부 혹은 면벌부를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또 다른 형태의 면죄부를 통해서 복음을 왜곡하고 있다. 그리하여 구체적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개교회에만 봉사하고 헌신하는 맹종적인 교인을 양산해 내는 것이다. 그런 교인들의 본은 겉으로 보이는 것, 주일성수, 십일조 등의 헌금과 방언, 금식 등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들로 채워지게 되어 신앙의 형식화를 가져오고 역사의식 없는 절름발이 신앙인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다.


조금 길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을 긍정적인 존재로 인정해 주셨으며,
이기적 유전자를 타고난 경쟁 동물이 아니라,
공감 DNA를 타고난 더불어 사는 존재물로 삼아주셨다.

https://www.facebook.com/wiidplant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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