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앞에서
1985년 겨울, 나는 강원도 원주 태장동 골목길에 서 있었다.
날은 추웠고, 이미 얼다 녹기를 반복했던 발은 동상에 걸린 지 오래였다.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온몸으로 체험해 봐야 사람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아르바이트를 했다.
'Arbeit(노동)'
그러나 연약한 내 몸은 강원도 추위를 감당하지 못했고, 40일 만에 생사를 넘나드는 고열로 고생을 한 끝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삶의 저 밑바닥까지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연탄재처럼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태장동 골목길은 좁아서 연탄재와 쓰레기는 리어카나 경운기로 실어 날라야 했다.
가정집은 한 달에 3천 원, 식당은 1만 5천 원을 받고 한 달 내내 연탄재와 쓰레기를 수거해 쓰레기 매립장에 버리는 일이었다.
문이 닫혀있는 집의 연탄재와 쓰레기를 수거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면 "누구세요?"라는 주인장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쓰레기요"하면 문이 열렸다. 나는 쓰레기가 아닌데, 그냥 나를 쓰레기라고 불렀던 것이다.
연탄을 연료로 사용하던 시절이었고, 대부분의 집들은 연탄을 피우는 부엌이 곧 욕실이기도 했다.
다들 문을 잠그고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연탄재와 쓰레기가 놓여 있던 곳은 정해져 있으므로 집집마다 자유롭게 드나들며 연탄재와 쓰레기를 수거했다.
태장동은 미군부대를 끼고 있는 동네였기에 'only USA'라는 간판이 달린 가게도 제법 많았다.
어느 날, 연탄재와 쓰레기를 수거하려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엌문을 열었다가 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목욕을 하는 중년의 여성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문을 닫았다. 그때 나는 나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아저씨, 어차피 다 봤는데 연탄재하고 쓰레기 그냥 가지고 가세요."
나는 얼굴을 돌리고 쓰레기와 연탄제를 꺼내 리어카에 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추정이긴 하지만), 그 중년의 여인도 분단이라는 역사의 아픔을 몸에 새기고 사는 여인이었다. 고향을 떠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으며 미군들을 상대해야 하는, 먹고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이 땅의 누이였던 것이다.
참으로 오래 전의 일을 기억해 낸 것은 알고 있는 선배 목사의 페이스북 글 때문이었다.
전주 쓰레기 소각장 문제, 완주 쓰레기 매립장 문제, 군산, 새만금 쓰레기 문제 등 부르는 곳마다 달려가 대회사, 연대사, 격려사 등을 통해 "쓰레기! 쓰레기! 안돼! 안돼!"를 외치는 선배 목사가 "나는 쓰레기 목사가 되어버렸다!"라고 한 글을 읽었다.
나도 한 때 쓰레기였는데....
겨울로 접어들어 제법 쌀쌀해진 오늘 새벽, 나는 자연스럽게 연탄재를 떠올리게 되었고, 몇 해전 태백 탄광촌에서 한 때의 영화를 뒤로하고 쇠락해가는 골목길을 떠올렸다.
겨울 초입에 돌아본다.
너는 언제 연탄처럼 뜨거워본 적이 있는지, 그렇게 자신을 태워 남을 따스하게 해 준 적은 있는지....
그리고 지금은 또 어떤지.
세상은 속절없이 변했고, 나도 세월이라는 배를 타고 훌쩍 제법 긴 세월의 강을 건너왔기에 내 안에 남은 온기로 누군가를 따스하게 해주는 것인지 반성한다. 나 하나 따스하게 할 능력도 없으면서, 나에게 기대고 있는 이들 하나 제대로 따스하게 해 주지도 못하면서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겨울이 가기 전에, 그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따스한 온기라도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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