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물머리에서
아주 오래된 가을 풍경을 꺼내어본다.
5년 전(2014년) 어느 날 아침 이맘때 나는 그곳 두물머리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그런 열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곳에서 아침을 맞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는 그와 다르지 않은 또 다른 하늘을 맞이하며 하루를 열어가고 있다.
가을에 가을을 품은 사람을 생각한다.
가을은 시원하다.
시원한 사람,
온갖 잡다한 사설로 꽉 막힌 사람이 아니라 통달하여 여기저기 시원한 바람과 같은 맑은 정신을 가진 사람이 가을을 품은 사람일 터이다.
가을은 가볍다.
놓아버림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쭉정이라 가벼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부질없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가을을 품은 사람일 터이다.
그날 아침,
아침햇살과 물안개가 만들어낸 황홀한 빛을 보면서 더불어 삶에 대해 생각했다.
너와 나,
너와 네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서로 다르다고 싸움박질하기 위함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비추어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혐오하고, 너는 왜 나의 생각과 다르냐며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풋풋함이 아니라 설익어 떫은 과일처럼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다.
가을엔, 가을 열매처럼 무르익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
인생의 단맛과 쓴맛과 신맛이 어우러진 독특하지만 감칠맛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중년 이후의 삶과 억새는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연약한 듯 하지만, 서로 부대끼며 서로가 서로에게 힘을 주고 큰 은빛 물결을 이루어 눈부신 은빛 바다를 만들고야 마는 억새는 파도가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른바 고정관념이 하나 둘 깨어지는 시기가 가을이 아닐까 싶다.
가을을 품은 사람은 고정관념에 붙잡힌 사람이 아니다. 자유로운 사람이다.
신앙이나 사상이나 그 무엇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선명하게 품고 있으면서도 자기만의 색깔을 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가을을 품은 사람 이리라.
그 아침에 나는 그냥 잡초로 불리는 강아지풀을 만났다.
흔하디 흔한 풀, 그러나 그는 그냥 그렇게 흔하디 흔한 풀이 아니었다.
아니, 그는 본래 그렇게 아름다운 존재였던 것이다.
내 삶이 아직 빛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아직 내 삶을 조명해줄 무언가가 준비되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자책하지 말 것. 이것이 가을을 품은 사람의 품격일 터이다.
가을이 깊어간다.
내 안에도 가을을 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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