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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Jan 07. 2019

누가 '신'을 보았다 하는가?

# 다 보지 못해 오히려 더 잘 보이는....


'본다.'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과연, 우리 인간은 '봄'으로써 보는 대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것일까?

'보암직 함'이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당한 인간 현실의 출발이 되었다고 성서는 전하고 있다. 과연, 선악과를 '보암직'한 것으로 본 인간의 눈은 '제대로 본 것'일까?



뒷모습에서 오히려 진실을 보고, 그림자를 통하여 실존을 본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봄'이야말로 '다 보지 못함'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늘 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또는,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을 지고의 신앙인 것처럼 착각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메시아를 그토록 갈망했던 그들 앞에 '메시아'가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본(?)' 메시아에 눈이 멀어 그를 보지 못했다. 


이것이 그들의 비극이었다. 
보지 못하고 보았다고 생각한 비극



나는 정오의 그림자가 짧은 만큼, 자정의 그림자도 짧다고 생각했다.

빛이 없는 자정의 그림자를 본 적이 없으므로, 전은영 시인의 '우리의 동정심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는 문장에 공감을 하면서도 의심에 한 발은 딛고 있다. 그래서 온전한 공감은 아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더라?
맞다. 실루엣에 대한 묵상이다.



사실, 보는 만큼 보이지 않고, 보지 않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다 보고 나면 실망하는 것이 인간이고(사실은 그게 다 본 것이 아님에도),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것을 탐닉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아 보고자 할 때, 그때가 어쩌면 가장 사랑하는 순간이다.


의심이 든다.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안다'라고 한다.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므로, 그들은 서슴없이 '신'을 보았다고 하고, '신의 뜻'을 아는 신통방통한 재주를 자신들이 가졌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본 신은 도대체 무엇이고,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신은 누구란 말인가?



신은 나에게 볼 수 없는 '절대적 타자'가 아닌 볼 수 있는 '타자'를 통해서 자기를 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껏 그의 그림자 밖에는 보지 못했으며, 그것조차도 흔들리고, 비 오는 날이나, 어둠이 짙어지면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절대적 타자'는 물론이고 '타자'도, 심지어는 '나'도 보지 못했다. 미련한 까닭 이리라.


그런데, 나는 보지 못했지만 그림자처럼 느낄 수 있었기에 '절대적 타자'를 부정하지 못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의 나의 고백이다. 그래서 '보지 못한 신'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도 나는 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가짜들이 저마다 그를 보았다고 하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보이는 분이 아니라고 말해야만 한다.



분명한 것은, 신을 본 자는 절대로 그를 보았다고 확신할 수 없으며, 그를 보았다고 확신하는 자는 단언컨대 신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맹인이다. 그리고 또 분명한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맹인의 손을 잡고 그 나라를 향해 가고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그 '믿음'은 불행하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그 '믿음'으로 인해 '행복'하다.


누가 '신'을 보았다고 하는가?
자신들이 만든 거짓 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보일 수 있겠는가?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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