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다면, 사형당해야 할 교회는 어느 쪽일까?
예수 당시에는 오늘날 기독교가 지키는 주일이 있었을까?
주일은 1세기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지키면서 유래되었다. 그리하여 ‘주님의 날’이라는 의미를 담아 ‘주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당시에 ‘주일’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전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관련하여,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일(쉼)’에 방점을 찍어 ‘안식일’을 지켰다. 오늘날 기독교는 ‘안식일’을 자연스럽게 ‘주일’과 연계하여 지키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안식일’에 관한 법은 이렇다.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 날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겨레로부터 제거될 것이다(출애굽기 31:14).”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사형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강력한 법이 만들어졌을까? 이 부분을 생각하면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은 ‘출애굽기’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창세기’가 가장 앞부분을 차지한다. 그렇게 된 이유는 내용상 ‘창세기’가 앞에 있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430년 간 노예생활을 했던 히브리들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며,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노예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365일 쉴틈 없이 노예로 부림 당하던 이들에게 ‘쉼’이란 어떤 의미일까?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으며, 그들이 새롭게 이뤄갈 나라에서는 쉼 없이 노예처럼 일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원했던 것이다. 강력한 법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소한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안식’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창세기를 우주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이해하는 창조과학회 같은 이들에게는 실망이겠지만, 창세기는 인류의 기원이나 언어의 기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노예 생활을 하던 이들이 광야로 나온 후’ 노예였던 자신들도 자신들을 노예로 부리던 ‘파라오’와 같은 인간이라는 인권선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 다윗 왕조 때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남북으로 분열되었으며,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또다시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아예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식민정책(혼혈 정책)에 의해 ‘사마리아인’이 되어버린다.
바벨론에게 망한 후 포로지에서 살아가던 이들은 바빌론 강가에서 자신들이 망한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잊고 살았기에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반성을 했다. 그리하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라를 회복시킬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철저하게 지킬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독립하지 못하고 고대 근동 지방의 패권자들이 바뀔 때마다 그들의 식민지 백성이 되어 살아간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안식일’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유대인들을 묶은 하나의 고리였으며, 단순히 회당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나이가 나타나서 지고의 선으로 믿고 지켜온 ‘안식일’을 훼손한다. 그것도 고의적으로.
신약 성경 복음서에는 안식일 법과 관련된 대표적인 사건이 나온다.
하나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에서 이삭을 자른 일이다. 바리새인들이 ‘추수하지 말라’는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시비하는 빌미를 준다. 또 하나는, 안식일에 회당 한가운데에 손 마른 사람을 서게 한 후에 고쳐주신 일이다. 사람들은 이 일로 예수를 고발하려고 벼르고 있다. 안식일 법을 어겼으니 죽여버리려는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12:2)" ’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당시 ‘안식일 법’은 법의 형식과 껍데기만 남아서 본래의 법 정신을 잃어버렸다.
위에서도 밝혔듯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은, 일 년 365일 쉬지 못하고 강제노역을 하던 노예생활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세부조항을 만든다.
유대교에서는 39가지 금지 조항(미쉬나)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추수와 병 고치는 일 외에도 알파벳을 두 자 이상 쓰거나 지우는 일, 빗질도 포함되었다. 빗질하다 머리털이 빠지면 ‘털 깎는 일’에 해당한다. 심지어는 매듭짓기와 풀기도 안된다. 단, 신발 끈의 매듭 매거나 푸는 일은 허용된다. 이렇게 복잡한 법 조항들은 문자로 기록되었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에는 문자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이들은 소수였으며, 설령 일반인이 안식일 법 조항을 읽는다고 해도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지 늘 불안했다. 이렇게 안식일 법이 본래의 정신을 상실하여 사람을 옥죄는 법이 되자,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고의로 어기시면서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고자 하셨던 것이다. 축약을 해서 설명을 했음에도 조금(?) 길었다.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전환했다. 그러나 일부 보수교회나 몇몇 교회들은 ‘주일예배’를 고수하고 있다. 주일을 성수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신앙이 훼손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안식일 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에 얽매여 성서의 정신을 훼손하는 일이다.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할 교회가 이웃들에게 불안과 공포심을 조장하는 교회가 된다면, 전염병의 확 산지가 된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일인가? 오히려 사상초유의 사태 앞에서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리며 ‘코로나 19’가 속히 진정되기를 바라는 교회가 진짜 교회가 아닌가? 그들이야말로 오히려 ‘제 몫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자신들이 아픔을 감내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 법을 어겼으니 사형을 시켜야 할 교회(상징적으로)는 가정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문자에 얽매여 주일예배를 고수하는 교회들은 안식일의 의미를 훼손하였으므로 사형당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숨통을 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