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뜨기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쇠뜨기라는 속새과의 식물이 있다.
다년생 초본으로,
그 화석이 지층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 식물은 지구 위에서 아주 오래된 시간을 견뎌온 생명이다.
공룡의 발자국을 기억하고,
대륙이 갈라지는 진동을 온몸으로 받아냈을 쇠뜨기.
그야말로 고대의 생존자다.
농부라면 누구나 이 식물의 끈질긴 생명력 앞에 한숨을 내쉬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논밭을 점령하며 줄기차게 자라나는 쇠뜨기,
김을 아무리 매도 이내 다시 고개를 내밀고 마디마디 올라오는 억센 생명.
도시의 골목 모퉁이, 작은 화단, 아파트 옥상 화분에서도 이들의 흔적은 쉽게 발견된다.
김을 매는 아낙이 지나가면 쇠뜨기들이
“머리에 수건 쓴 년 갔니?” 하며 일어선다는 농담도 전해진다.
사람들이 아무리 억누르고 베어내도, 쇠뜨기는 다시 자란다.
마치 고통과 억압을 밟고 피어나는 민중처럼.
하지만 정작 쇠뜨기의 줄기는 연약하기 그지없다.
마디줄기로 되어 있어서 살짝만 힘을 주어도 뚝뚝 부러진다.
억세게 살아가는 듯 보이는 존재가 실은 깨지기 쉬운 마디를 가진 것이다.
어쩌면 쇠뜨기의 입장에선 이 연약한 마디가 자신이 벗고 싶은 약점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러지는 마디 때문에 쇠뜨기는 뿌리에서 줄기를 다시 올리고, 다시 생장을 시작할 수 있다.
연약함이야말로 그것이 살아남는 방식인 것이다.
가장 유명한 쇠뜨기의 이야기는 1945년 히로시마에서 비롯된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폐허가 된 땅, 불모의 도시.
학자들은 말했다.
“여기서 식물이 다시 자라려면 최소한 50년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이듬해, 초토화된 잿더미 속에서 당당히 푸른 싹을 틔운 식물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쇠뜨기였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자리, 아무도 살아날 수 없을 것 같던 땅에서 쇠뜨기는 조용히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은 눈물을 흘렸고, 다시 살 희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절망 속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존재는, 반드시 강한 존재가 아니라 기어이 살아내는 존재였다.
쇠뜨기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도 않고,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지도 않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치장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온갖 연약 속에서도 끝내 생명을 이어가며
삶의 낮고깊은 자리에서 생명의 영성을 예언자처럼 고요히 증언한다.
우리의 연약함도 이와 같지 않을까.
겉으로는 단점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사람답게 하고, 신 앞에 서게 하는 조건일지 모른다.
우리는 종종 연약함을 부끄러워하며 그것을 숨기려 한다.
더 강해지려 애쓰고, 단단한 척하며 살아가지만,
그 연약함이야말로 우리를 교만으로부터 지켜주고,
다른 이들의 고통에 눈을 감지 않게 하며, 타인의 상처를 껴안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기도 한다.
연약함을 아는 자는 감히 신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자만이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짊어질 수 있다.
스스로를 완전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타인을 판단하지만,
연약함을 기억하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니, 나의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자.
그것은 살아내기 위해 주어진 틈이요, 신이 허락하신 숨쉴 구멍이다.
지나치게 강한 것들은 부러지고 마는 법이다.
쇠뜨기가 원폭 이후의 땅을 딛고 일어났듯,
우리의 삶도 연약함 속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의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린도후서 12장 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