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인간답게 살기위한 첫 걸음
공감은 타인을 자세히 바라볼 때 시작된다.
그 사람의 표정, 말투, 숨결을 눈에 담고,
한 걸음 물러서서 그 자리에 자신을 세워보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공감은 오래도록 깊이 바라보는 시선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공감은 본능이다.
신경과학은 이를 ‘거울 뉴런’이라는 구조로 증명했다.
다른 이의 아픔을 볼 때, 그 아픔을 직접 겪지 않아도 우리의 뇌는 마치 자신이 그 경험을 하는 것처럼 반응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울면 나도 괜히 울컥하고, 누가 하품을 하면 나도 따라 하품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본래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com(함께)과 passio(고통)에서 유래한 말로, 말 그대로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단순한 동정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타인의 아픔에 나의 존재 전체가 반응하고 머무는 행위가 공감이다.
그러므로 공감은 감정의 흔들림을 넘어, 삶의 자세이자 존재의 방식이다.
문제는, 이 본능적 감각이 사회 속에서 점점 억압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라면서 공감보다는 경쟁을 배운다.
입시에서, 취업에서, 조직생활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을 이겨야 할 대상, 넘어서야 할 경쟁자로 바라보는 법을 훈련받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타인의 고통에 눈감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제도교육도 예외는 아니다.
지식을 가르치고 성과를 요구하면서, 감정을 나누는 일은 비효율로 치부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는 잘하게 될지 몰라도, 슬픔에 반응하는 법, 기쁨을 함께 나누는 법, 아픔을 견디는 법은 배우지 못한다. 그 결과, 인간은 사고의 능력은 커졌지만 감정의 언어는 메말라간다.
이런 공감의 상실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 전체가 사람을 사물처럼 대하는 방식으로 물들고 있다.
사람은 점점 성과와 효율로 평가되는 대상이 되고, 관계는 유용성과 필요에 따라 맺어졌다 끊어지며,
자신조차도 도구처럼 다루게 되는 시대를 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공감이 차단된 사회의 구조적 증상이다.
특히 오늘날의 정치와 미디어 환경은 공감보다는 분노와 혐오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다.
타인을 적대하거나 조롱하는 언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정을 누르고 판단해야 한다는 믿음.
이런 문화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나아가 자신의 아픔조차 돌보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기억한다.
누군가가 슬퍼할 때 함께 울어주는 순간, 말없이 옆에 있어주는 그 사람의 존재,
가장 깊은 외로움 속에서 누군가의 눈빛 하나에 울컥했던 기억.
그것은 모두 공감의 흔적이고, 그 공감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공감은 연약함이 아니다.
공감은 사람을 무르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공감은 가장 깊은 내면의 강인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속수쳐 오르는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용기는 타인을 살릴 뿐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회복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바라보며 마음이 움직일 때,
그 감정은 우리를 고립된 자아로부터 꺼내 다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으로 이끌어준다.
공감은 나 혼자만의 바람이 아니다.
공감은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원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공감 없이 인간은 행복할 수 없고, 공감 없는 사회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공감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타인의 눈을 마주치고, 아픔에 머물며,
함께 웃고 함께 아파할 줄 아는가?
그 질문에서부터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공감은 그렇게, 인간다움의 회복이며,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회심의 시작이다.
“누군가에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아픔이 잠시 내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다.”
—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공감은 그런 자리 하나를 조용히 내어주는 일이며, 그것이야말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의 시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