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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수 Sep 05. 2016

다 볼 수 없어 더 아름다운

#실루엣이 보여주는 더 선명한 감동

실루엣


가을 하늘은 높고 햇살은 따가울 때면, 자연의 이파리들과 꽃들이 만든 실루엣에 눈길을 주며 한나절을 보내기도 한다. 이것과 저것의 만남과 조화, 나의 눈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실루엣의 향연은 한나절이란 시간을 짧게 느껴지게 한다.


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 다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 보이는 것 너머에 있다는 것, 다 볼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다. 유한의 존재물인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신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루엣


뭔가 몽환적이고 신비적인 것,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인한 그것은 다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상상력의 옷을 입고 내 앞에 나타난다. 


어쩌면 실루엣은 관음증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관음증의 끝은 모든 것을 다 보고(다 볼 수 없지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허무함이라는 것에 도달한다. 관음증의 친구는 망각이라서 이내 그 허무함을 망각하고 또다시 보고 싶어 하는 무한의 반복이다.



그러나 '다 볼 수 없어 더 아름다운'은 '관음증'의 한계를 넘어선다.

오히려 '다 볼 수 없어 더 아름다운'은 '볼 수 있어도 보지 않고, 보았어도 다 보지 못했다'는 것과 연결된다.


다 볼 수 없고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보고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비다.

  
실루엣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와 통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조금 아는 것, 아는 것의 시작에 섯음인 것이다.


설익은 이들은 자신이 모든 것을 통달한 것처럼 느끼고 행동하지만, 익어가는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탄식하는 것이다. 이 탄식은 허무함으로 그들을 안내하지 않는다.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이 세상은 알만한 가치가 있으며, 살아갈만하다는 긍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경쟁의 사회는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여기며 살아가게 만든다.

실체도 없는 것들이 실상인 것처럼 우리를 현혹하고, 그 누구도 본 적도 없기에 끊임없이 추구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헛되게 만들어 "헛되고 헛되도다!"의 결론에 다다르게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인생이 헛된 것인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것, 본질을 추구하는 삶은 설령 지금은 희미하게 보일지라도 허무함이라는 결론에 다다르지 않는다.


오히려, 볼 수 없음, 알 수 없음으로 인해 모든 것을 보고, 알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알 수 없음으로 '텅 빈'가운데에서도 '충만함'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텅 빈 충만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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