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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로 May 21. 2024

어떤 폭군의 마지막 유언

연산군과 중전 신씨


한때 패도와 공포를 무기삼아 폭정을 일삼던 군왕은 이제 그 욱일승천하던 위세는 온데간데없고 거죽의 초라함만이 남아있었다. 아직 젊은날의 혈기가 남아있을 이립의 나이였으나 폐위라는 단어가 육신의 정기를 다 훑어갔으니 지난 날 군왕이 부리던 위세는 오직 왕좌라는 자리에서 나오는 힘이지, 육신에 깃들지못하는 아지랑이일 뿐이었다. 사내는 자신이 꿈을 꾼것인지 잠시 착각하였으나, 주변을 다시보고서야 냉혹한 현실이 실재임을 비통한마음으로 주워섬겼다.

창백한 얼굴에 종잇장처럼 낭창해진 몸을 두르고있는 옷은 이미 그 폭이 넓어 모든것을 잃어버린 사내를 더 애처로워보이게만들고있었다. 그런 사내를 묵묵히 바라보고있던 나인이 그저 한마디를 얹었다.

"죽이라도 더 드시옵소서"
"..이만 내가거라.."

눈에 남은 정기가 없고 심화가 북받쳐 이미 몸이 상할대로 상해버린 사내의 얼굴은 그럼에도 여전히 관옥같았다. 흉폭한 내면과는 어울리지않는 얼굴이라. 군왕이던 시절 어디선가 들었던 수근거림이 빈한하기 그지없는 오두막집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가끔씩 웅웅대며 문풍지를 두드리는 바람소리가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뿐이었다. 이융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까끌한 이불과 버석거리는 베갯잇이 그가 지금 있는곳의 현실이었다. 사내의 눈에는 여전히 빛이들지않았다.

'쿨럭'

계절의 변화는 축생과 사람들의 사정을 고려하지않는 바, 어느덧 찬바람이 불어오니 벌써 겨울 초입이었다. 세찬바람이 방안까지들어와 한참을 휘돌고 나가는데, 이융은 목에서 올라오는 까슬거림을 참을 수 없었고 이내 기침을 내뱉었다. 기침 을 할 때마다 그의 기력이 같이 빠져나가는것 같았다. 까끌거리는 이불이 오히려 냉기를 품어 더욱 차가웠으나 사내는 그런 천자락이라도 끌어 몸에 두를 수 밖에없었다. 방안에도, 방 밖에도 온기라는것은 없었다. 사내는 불과 두 달전까지의 자신이 얼마나 뜨거운 인간이었는지를 잊어버렸다.

온기라. 아주 뜨겁거나 차갑거나. 양 극단만을 오고가던 자신의 짧은 삶에서 따스함이라는것을 느낀적이 있었던가. 그렇다면 그건 언제였는가. 폐위된 사내, 이융의 눈이 슬쩍감기었다. 어느새 그의 몸은 모로 누워진채였다.

'온기가...따스함이..그런것이 있었구나..'

중전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버들잎처럼 가벼운 몸에 그 어디에도 모난곳이 없었다. 나비가 꽃에 가볍게 얹히듯 중전의 말과 행동에는 고아함이 있었고 내면에는 그 격이 있었다. 웃을때는 화사하기가 볕아래 매화와 같고, 슬픈표정을 지을 때는 이 세상 슬픔 모두가 그녀의 작은 얼굴안에 들어서있는것 같았다. 이융은 그런 자신의 아내가 지닌 눈매를 좋아하였다. 부드럽지만 깊은 눈매를 지녔으니, 이융은 자신이 미쳐날뛸때에도 유일하게 그 눈매를 거역하지못하였다.

아비의 후궁을 때려죽이고 칼까지 뽑아들어 피바람을 일으키며 계모를 죽이겠다고 버선발로 뛰쳐나갈 때, 그를 멈춰세운것은 오로지 중전뿐이었다. 그의 팔을 붙잡아쥐고 '제발 그러지마세요'라며 울던 그녀의 처연한 눈매에 이융은 뽑았던 칼을 놓아버렸다.

중전은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이융의 패악질이 정도를 넘을때마다 중전은 신언패를 목에 건 신하들 대신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융은 그것들을 그저 거슬리는 소리라 치부하였으나 중전의 눈매 깊은곳에 박혀있던 어떤것 때문에 그녀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하던 신하들을 자신은 어찌 하였는가. 중전이라고 다를 수 있을까. 하지만 쓴소리를 하던 중전의 눈에는 신하들과는 다른것이 맺혀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온기였다.

'나를 그렇게 보지마오..중전'

중전은 이융의 망나니짓을 보면서도 그를 혐오하지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그에 대한 걱정과 온기 두가지만 어려있었으니, 이융은 이제와서 느끼기에 그것이바로 사랑이었다는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이융은 자신이 궁밖으로 쫓겨날때, 중전의 울음섞인 간청이 이루어지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벽지에 와서 중전까지 고생할 수야 있겠는가라는 감상이 함께였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융은 겹겹이 이불을 두르고도 느껴지는 혹한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기가 그리웠다. 어느 날 인가부터 떨리기 시작한 몸은 단순히 한기때문만은 아니었을터, 의원들은 고개만 저으며 떠나갔다.

'...추악스러운 삶에 대한 업보구나. 당연한 죽음이로다.'

감겨진 이융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모로 떨어졌다. 떨리던 몸이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차가운 몸에서 따뜻한 눈물이 흘러내리니 이융은 그것이 새삼스러웠다. 떠지지못해 캄캄한 눈 안에 어렴풋한 상이 맺혔다. 이융은 그 어렴풋 한 상이 지금 자신이 가장 갈망하는 존재임을 알아챌 수 있었으니, 눈밖으로 흘러나오는 눈물은 그래서 따뜻한것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융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몸의 떨림은 이제 완전히 멈추었다. 이불을 꼭 쥔 손도 이미 풀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나인이 나직하게 물었다.

"...남기실 말씀이 있으시옵니까"

새하얗다못해 파란기운까지 띄는 이융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올라왔으나 그것은 나인이 알아챌 수 없는것이었다. 이미 이융의 정신은 이승을 넘어서고 있었다. 가죽주머니에서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가 이융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중전..중전이 보고싶구나..."

얕은숨이 한번, 그리고 까무룩한 어둠, 적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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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명실공히 조선 최악의 폭군이자 암군이죠.

재평가의 여지가 그다지 없는 인물입니다.

다만 연산군은 중전이었던 신씨를 지극히 사랑했다고 전해집니다. 폐비 신씨는 아름다우면서도 자애롭고 품성이 착하니 위아래할거없이 궁중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전해지죠. 연산군이 신씨에게서 거슬리는 소리를 들어도 유일하게 그녀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합니다. 여러매체에서는 장녹수와의 드라마틱한 부분이 많이 부각되어있으나 사실 연산군에게 중전이라는 존재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는 인상이 많이 남습니다. 폐위된지 2개월여 후 학질로 죽게되는 연산군 이융은 마지막 유언으로 녹수가 아니라 '중전이 보고싶다' 라는 말을 남겼다하니 그 의미가 자못 서정적입니다.


p.s 본문은 마지막 유언에 대해 연산군이 이러지않았을까, 연산군의 마지막을 제가 멋대로 써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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