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윤희에게'
엄마. 언니. 당신. 윤희는 관계 속에서 이름이 아닌 호칭으로 불린다. 하지만 영화의 도입부에서 그의 이름은 누군가의 중요한 존재로서 불린다. 윤희에게. 여느 편지처럼 이름을 부르며 운을 떼지만 편지가 보내지고 도착하는 과정은 평범하지 않았다.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쓴 사람이 아니었고, 편지를 열어본 사람 또한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닌 그의 딸이다. 이렇게 보낸 사람과 받은 사람이 본인이 아닌 가족이라는 것이 절대 만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을 이어주는 계기가 된다.
서로 좋아하면 만나면 되잖아. 사랑하는데 왜 같이 안 살아? 세상엔 이런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덜질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런 질문에 목구멍이 턱 막혀서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려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다가도 얼굴을 눈에 담는 순간 왈칵 감정이 터져 나와 뒤에 숨어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 그런.
삶의 의미 있게 해 주었던 만큼 결별은 주었던 의미와 함께 삶의 일부까지 떼어가 버린다. 그것이 상대가 싫어져서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그것을 이기지 못한 자신 때문이라면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게 될까. 윤희는 무엇에도 기대를 하지 않고 평생 자신을 숨기며 삶을 형벌처럼 살아간다.
이야기란 응당 짜인 틀이 있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사랑했었다는 한 마디로 수십 년의 세월이 모두 소급되어 이해하게 된다. 그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는 것 만으로 눈물이 물줄기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그저 인사말일 뿐이더라도 그들이 느꼈을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란 무엇일까. 어떤 감정을 전달해야 할까.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단순히 재미만 따진다면 쥰이 새로운 사람과 가볍게 만남을 가질 수도, 윤희가 바에서 새로운 누군가에게 설렐 수도 있지 않았을까. 딸과 그의 애인이 조금 더 작전을 펼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껏 쌓아왔던 내 안의 정보로 인해 예상되는 뒷이야기 들은 전부 비껴나갔고, 그저 그들의 감정만으로도 이야기가 힘이 있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점점 변화하는 감정의 흐름과 엮이고 섞이는 관계들에서 설렘과 기쁨을 느꼈다. 그들이 행복하게 살지 또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자기 자신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 어떤 표정이 되는지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