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지기 친구 윤에게 전화가 왔다. 책을 읽다가 젊은 시절의 우리가 떠올랐다며, 나와 통화하기 이전에 다른 친구에게도 전화를 했단다. 윤은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전화 통화 당시엔 버릇처럼 괜찮다고 읊조리며 윤의 마음이 풀리는 데에 집중하느라 내 감정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자기 전 누워서 윤의 말을 진지하게 곱씹어 보았다. 윤을 울린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윤은 과거를 그리워했다. 젊었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열려있던 시절. 모든 것이 재밌던 시절. 보고 싶다는 마음만 있으면 서로의 집에 모여들어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 수 있던 시절.
지금은 가정을 꾸린 친구를 만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만날 사람이 셋 이상이 넘어가면 시간을 맞추기도 어렵거니와 몇 달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는 그때처럼 속 깊은 이야기가 금방 나오지도 않는다. 두 시간 내내 가벼운 근황만 오가다 대화가 끝나기도 한다.
나와 윤은 20대 초중반 같은 집에서 함께 살았다.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동안 대전으로 내려온 윤의 홍대 예찬으로 모든 것이 시작됐다. 윤은 홍대 앞이 얼마나 자유롭고 멋지고 흥미로운지 설명했고, 그 얘기를 듣던 나는 그 안에 내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상상을 했다. 허드렛일을 해도 홍대 앞에서 라면 특별할 것 같았다.
"나도 홍대에서 살고 싶다."
"그럼 올라와. 우리 집 넓어."
"나 진짜 간다?"
"그래. 진짜 오라니까?"
짧은 대화 끝에 나는 휴학을 한 뒤 여행용 가방 하나만 들고 서울로 상경하게 됐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와 윤은 친한 친구이긴 했으나 절친으로까지 부르기는 어려운 사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윤은 그렇게 선뜻 나보고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내가 진짜로 올라갈 줄은 몰랐겠지? 윤의 집은 광흥창역에서 15분을 걸어 올라가야 했고 그렇게 올라가고 나서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건물의 꼭대기였다. 천장은 대각선 모양으로 기울어져서 170이 넘는 사람이라면 머리가 닿았을 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키가 작아서 허리를 펴고 생활할 수 있었다.
한동안 나와 윤 모두 저녁 10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오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첫 직장에 취직했고 윤은 학교를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먼저 집에 도착한 사람이 서로에게 전화를 했다.
"언제 와?"
"금방 갈 거야. 뭐 사갈까?"
"그럼 떡볶이!"
늦게 퇴근한 사람이 먹을거리를 사 오자 자주 야식을 먹게 됐다. 라디오를 좋아해서 새벽까지 라디오를 켜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아랫집 사람이 올라오기도 했다. 라디오를 끄고 누워서도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 동안 느꼈던 감정들과 깨달은 것, 고민을 매일매일 나누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전부. 공감하고 의견을 나누며 생각이 공명했다. 매일 야근해도 어째서 그날들이 그렇게 좋았는지. 지금 돌아보면 함께 있던 사람이 윤이었기 때문이다.
독립을 하면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다. 윤은 고양이를 무서워했다. 그래도 끈질기게 설득했다. 아기 고양이는 안 무서울 걸? 결국 검은 고양이만 아니면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둘이 함께 고양이 카페를 둘러보고 마음이 가는 아이를 선택했다. 산책을 좋아하는 하얀 고양이는 밖에서 사랑을 빠진 후 다섯 마리의 아기 고양이를 낳았다. 그중 가장 힘이 세서 다른 형제들을 짓누르는 아기 고양이를 데려왔다. 건강하고 활발하게 자라라고 '고고'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고'혹은 '고똥'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다 '고고'보다는 '고똥'이 입에 붙어서 '고똥고똥' 부르다 보니 어느새 나는 '민똥' 윤은 '윤똥'이 되었다. 윤똥이 밤늦게 과제를 하고 있으면 고똥은 윤의 스케치북에 올라와 연필을 가지고 놀고는 했다. 고똥은 머리 위에 마치 가르마를 탄 것처럼 갈색과 검은색 무늬가 반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우리는 그 무늬가 얼마나 특별하고 예쁜지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고양이에 대해 하나씩 배우고 커가며 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새로운 기쁨이었다. 밖에서도 고양이를 보면 둘은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우리 고고가 제일 이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광흥창 옥탑에서 합정의 반지하로 이사하게 될 때까지 나는 윤의 집에 얹혀살았다. 직장을 구하긴 했으나 최저 임금에 가까웠고 그마저도 중간에 때려치우고 사법고시를 준비하겠다는 나를 윤은 지지해주고 배려해줬다. 집세를 받지도 않고 심지어 반지하 말고 좋은 곳에서 공부를 하라며 집 근처 카페의 한 달 이용권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추억은 셀 수 없다. 와우북 시장에 중고서적을 내다판 일. 연남동 마을 시장의 중고 마켓도 참가했었다. 지방선거 때는 서교예술센터에서 참관인을 하기도 했다. 같이 자전거를 타고 골목 구석구석 탐험을 하기도 했는데 그러다 엔트러사이트를 발견했다. 그 당시에는 유명해지기 전이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2층의 넓은 소파에 거의 눕듯이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여기가 우리 집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며 사진을 찍어 싸이월드에 올렸다. 그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한다면 셀 수가 없다. 그만큼 우리는 많은 것을 함께 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그때를 떠올릴 것이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 또한 눈물이 난다. 왜 눈물이 날까? 다시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또다시 함께 살게 되는 날이 올까?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하던 시절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손 닿는 거리에 서로가 존재하고, 매일 그날의 고민을 나누던 때가 올 수 있을까?
분명 그때도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먹고살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 과도한 업무 등으로 힘든 일도 있었다. 그 시절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행복한 기억만 남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때의 우리는 빛났다. 우리가 함께한 시절은 행복한 시절이라기보다 서로가 있기에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윤에게 말하고 싶다. 그 순간은 끝난 게 아니라고. 아름다운 순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우리가 서로를 떠올리고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한 아름다운 순간은 계속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