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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롭지엥 Oct 31. 2020

8분이 8시간이 된, 며느리

이젠 걸어 못 가요.

걸어서 8분 거리에 사는 며느리.

시댁과 저희 집은 8분 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시차가 8시간이나 되는 영국에서 살게 되었지요.

비행기로도 12시간을 가야 만날 수 있는 기나긴 물리적 간극이 생겼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손주들은 영국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시댁과 8분 거리 이제 걸어서는 못 가요.

비행기 타고 날아가야 하는 그곳, 여긴 영국 런던이거든요.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고, 시부모님은 제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언하셨습니다.

"아이는 봐주지 않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것만 꿈꾸던 저는

아이를 낳는 것, 육아하는 것, 워킹맘으로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대한 개념 조차 없었죠.

결혼의 현실성은 뒤로하고 달콤한 신혼생활에 대한 로망만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첫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첫째를 가져서 배가 남산만 했던 만삭 때도 회사를 다니던 저는 유독 일 욕심이 많았습니다.

회사에서 일 잘해서, 성공해서 임원까지 달아보려는 생각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연도 별로 성취해야 할 목표를 설정해 놓고 성공을 위해 달려 나갔습니다.


만삭의 임신부가 밤 11시~12시까지 이어지는 사업계획 수립하는 회의에 참석하며 야근을 하고,

혹여나 임신부라는 타이틀이 저의 커리어에 타격이 될까 노심초사하며, 상사와 주변 동료의 눈치를 봐가면서 체력이 견딜 수 있는 정도까지 최선을 다해 악바리로 일했습니다.


막상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을 때 슬슬 걱정이 되었습니다.

대기업에 좋은 연봉에 좋은 조건으로 다니는 회사였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야근을 하면서 이렇게 일할 수 있을까?

남들은 경쟁하듯 야근에, 주말까지 나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육아를 핑계로 편의를 봐달라 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내 자리가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앞으로의 커리어와 육아 사이에서 고민하던 저에게, 시부모님은 흔쾌히 아이를 봐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앗싸! 아이를 봐주시겠다는 마음이 행여나 달아날까 저희는 시댁 바로 옆으로 이사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시댁과 걸어서 8분 거리에 사는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아이를 돌봐주시고, 먹이고 재워주시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워킹맘으로 전쟁 같은 직장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그리고 인생의 항로를 바꾸어 직업을 바꾸게 되었을 때도 시댁의 손길은 구세주와 같았습니다.


맛있는 반찬도 늘 챙겨주시고, 저희 부부의 찬거리까지 공수해 주시는 시댁 덕택에

시댁과 8분 거리에 사는 며느리는 혜택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재원 발령을 받고 우리 가족만 오롯이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저였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요리를 해본 적도 없던 제가 우리 식구의 밥도 책임져야 하고

혼자 오롯이 육아도 해내야 합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밥해먹고, 아이들을 케어하고, 남편을 지원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주재원 발령을 받던 날,

벅찬 설렘과 기쁨이 찾아오면서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영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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